오쇼라즈니시4-7

서양의 붓다7

 

헤라크레이토스

숨은 조화

 

제2부 잠들어 있는 사람들 3

... 그대는 어디에 있건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대가 있는 곳이 그대가 부재하는 곳이다. 그대는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신이 아무리 그대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재는 외출중이다. 신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그저 그대 집에 머물러라. 신이 찾아올 것이다. 그대가 신을 찾듯 신도 그대를 찾는다. 그러나 그대가 집에 없으면 신은 그대를 찾을 길이 없다.

<원문>
어리석은 자들은 귀머거리와 같다.
아무리 그들이 듣는다 해도
그들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린다.
"그들은 어디에 있건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네"
잠든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 이것이 잠이다. 현재 순간에 부재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않고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는것. 그대는 현재에 존재하지 못한다. 세상 속에서도 그렇고 그대 자신에 관해서도 그렇다. 이것이 잠이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듣고 볼 수 있겠는가? 예수가 거듭해서 귀 있는자는 들으라 눈이 잇는자는 보라한 이유를 알겠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많은 사람들이 듣는 것 같지만 듣지 않고 보는 것 같지만 보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집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집에 없다. 눈은 보고 귀는 듣지만 주인이 안에 없다. 눈은 창문일 뿐이다.  그대가 창문을 통하여 내다보지 않는다면 창문 스스로 어떻게 보겠는가? 창문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창문가에 서 잇다면 문제는 다르다. 몸 전체는 집과 같다. 그런데 마음은 계속 여행중이다. 주인은 항상 여행중이고 집은 비어있다.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신이라고 불러도 좋고 존재계라 불러도 좋다. 이름은 상관 없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데 그대는 집에 없다.

잠든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 완전한 각성으로 행동하고 말하라. 그러면 그대 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깨어 잇음 자체가 그대를 변화 시킨다. 그대 자신을 통제하라는 말이 아니다. 통제는 깨아 있음이 없을 때 대신하는 빈약한 대용품이다. 만일 그대가 깨어 잇다면 분노를 통제할 필요도 없고 칠투를 경계할 필요도 없다. 깨어잇음 안에서는 그런 것은 사라진다. 부정적인 모든 것이 사라진다.

... 마치 빛과 같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제 그대는 더듬거릴 필요도 없고 벽에 이마를 부딫칠 핑요도 없고 문을 못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그대가 어둠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질투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꼴이다. 분노는 어둠 속을 비틀 거리는 몸짓이다.

... 일단 각성을 알게되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그대는 삶에서 가장 큰 지복을 안 것이다.이때 갑자기 많은 것들이 간단히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어리석고 우습게 보인다. 욕망이 떨어져 나가고 꿈이 사라진다.

잠든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깨어난 사람들은 공통된 하나의 세계를 갖지만
잠자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적인 세계를 갖는다.

... 꿈은 개인적인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꿈 속에 들어갈 수 없다. 꿈을 나누어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꿈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걸 나누어 가져 뭐할 것인가. 꿈은 거품처럼 허황하다.  꿈은 그대 혼자 꿀 수 밖에 없다. 잠자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은 자기만의 생각 개념 꿈, 욕망에 갇혀있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두 개의 세상이 충돌한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 꿈은 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진리는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진리는 내것이나 네것이 될 수 없다. 진리는 기독교인의 것이 아니며 무스림의 것도 아이고 흰두인의 것도 아니다. 
명심하라 모든 사적인 것은 꿈에 속한다. 진리는 활짝열린하늘이다. 이 하늘은 모두의 것이다.

... 그대의 세계를 버려야한다. 아내나 돈이나 직장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한 산야스 구도자의 길이다. 예전의 산야스는 눈에 보이는 이세상ㅇ르 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정을 버리고 사회를 등졌다. 그리고 무엇을 얻었는가? 버려야 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히말ㅇ라야도 나자렛도 추부도 이 세상이다. 그대가 진짜로 버려야할 것은 마음이다. 개인적인 꿈의 세계를 버려야한다.  자 마음을 버리면 그대는 시장바닥에 잇어도 희말라야에 있게된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 꿈의 세계를 버리지 못하면 희말라야에 들어가도 사적인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 그대 자신으로부터 탈 출할 수 있는가?  그대는 어디를 가도 그대자신과 함께있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똑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히말라야든, 아쉬람이든, 런던이나 파리든 상관 없다. 꿈을 버려라. 더 깨어 있어라. 그러면 돌연 꿈과함께 모든 불행이 사라진다.

깨어 있을 때에는 무엇을 보든 죽음이고
잠자고 있을 때는 무엇을 보든 꿈이다.

... 차믕로 아름다운 일이다. 잠들어 있을 때는 그대는 꿈과 환상 신기루를 본다. 이 모두가 그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다. 그렇다면 깨어잇을때 그대는 무엇을 보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죽음을 본다고 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실체를 보려하지 않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또한 그대가 꿈을 만들어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꿈의 구름층에 싸여 있을 때 그대는 죽음을 직시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어떻게 종교적이 된단 말인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할 때, 주변에 구름층을 제끼고 죽음과 정면으로 만날 때 문득 그대는 죽음이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삶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다.

... 죽음에서 도망치는 것은 곧 삶에서 도망치는 것과같다. 이것이 그대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역설적인 현상이다. 죽음에서 도망치면 죽는다. 그리고 죽음을 직시하면 살아난다. 주긍믕 ㄹ직시하고 죽음을 만질 수 있을 때 -예수 십자가의 의미- 마음이 죽음의 상태로 갈 때 다른 세계에 부활한다. 예수의 부활을 신체적인 현상으로 보지말라.

... 예수같은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는 망서렸다. 신이여 저를 버리나이까? 삶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했다. 그러니 그대는 죄책감에 젖을 필요는 없다. 그는 욕망에서 벗어낫고 영원 속에서 부활했다.

시간속에서 죽어라 그러면 영원 속에서 부활한다.
마음의 세계에서 죽어라 그러면 의식의 세계에서 살아난다.
생각의 차원에서 죽어라 그러면 각성의 차원에서 태어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깨어잇을 때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죽음이다고 했다. 우리는 사실을 외면하려고 진정제 마취제의 세계로 빠져든다. 사실을 직면하라. 그러면 사실은 진리가 된다. 사실을 외면하고 도망치면 거짓속에 살게된다. 사실을 직면하면 그 사실은 진리의 문이 된다. 그 사실은 죽음이다. 그 사실을 직면해야한다. 그러면 진리가 그대의 삶이 된다. 풍요로운 삶 끝이 없는 영우너한 삶이 찾아올 것이다. 이때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이때 삶은 죽음과 하나다. 이것이 숨은 조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