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시4-1
서양의 붓다1
헤라크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훨씬 낫다.
대립은 화합을 가져오고
불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생겨난다.
만물은 변화 속에서 안식을 발견하나니.
자신과 불화를 이루는 것이
어떻게 자신과 일치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수금(竪琴)과 활의 경우처럼
구부러진 등에도 조화는 있다.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나는 여러 생에 걸쳐 헤라클레이토스를 사랑해 왔다.
사실, 헤라클레이토스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그리스인이다.
물론, 묵타(Mukta), 시마(Seema), 니타(Neeta)는 논외로 하고 하는 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만일 인도 또는 동양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붓다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 그리스의 철학사에서 그는 이방인이고 아웃사이더(outsider)였다.
그리스에서 그는 깨달은 사람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모호한 사람", "어둠의 인간",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리스 철학과 서양 사상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철학자로 여기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기껏해야 그는 시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마저 용인하기 어려웠던지 나중에 다른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격적으로 결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생물학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이다.
그가 그토록 모호하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를 괴벽스러운 사람, 약간 돈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런 생각을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전체를 지배한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를 받아들였다면 서양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헤라클레이토스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는 서양 사상의 주된 흐름에서 동떨어진 인물이 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고탐 붓다, 노자, 또는 바쇼(Basho)같은 사람이었다.
그리스는 그에게 어울리는 토양이 아니었다.
만일 동양에 태어났다면 그는 거대한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고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기이하고 괴벽스러운 사람,
외국인 또는 외계인처럼 별난 사람에 불과했다.
그는 그리스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역사의 어두운 뒤안길에 묻혀 서서히 잊혀졌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태어나던 당시 인류는 절정을 맞고 있었다.
커다란 변형의 시대였다.
한 개인에게 변형이 일어나듯이 인류 전체가 변화를 맞게 되는 시점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7년을 주기로 변화한다.
칠십 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그대의 생물학적 체계는 열 번의 변화를 겪는다.
육체가 변화하는 시점의 시간적 틈을 잘 이용하면 명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주 쉬워진다.
예를 들어, 열 네 살이 되면 성(性)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육체가 생화학적 변화를 맞는다.
이 기간에 명상의 차원으로 들어가도록 인도 받으면 일이 아주 쉬워진다.
육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낡은 패턴이 가고 새로운 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거기에 틈이 있다.
스물 한 살 때 다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육체는 7년마다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한다.
낡은 세포 전체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태어난다.
서른 다섯 살 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육체는 7년마다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시점을 맞는다.
이 변형의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이 때가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일이 인류 전체에게도 일어난다.
2천 5백년마다 절정이 온다.
이 때를 이용하면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때에는 이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최정상에 도달한 순간에는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 형성된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2천 5백 년 전 인도에서는 고탐 붓다와 마하비라가 있었다.
중국에는 노자와 장자,
이란에는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그리스에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다.
그들은 최정상에 달한 인물이었다.
이전에는 아무도 그런 정상에 오른 적이 없었다.
설령 정상에 오른 인물이 있었다 해도 그들은 역사의 일부가 아니다.
역사는 예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2천 5백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다시 절정의 순간이 오고 있다.
다시 우리는 유동적인 시대를 맞고 있다.
낡은 것이 무의미해 졌다.
이제 과거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여기에 틈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다시 정상에 도달할 것이다.
조금만 주의 깊게 깨어 있으면 이 시기를 잘 이용할 수 있다.
삶의 수레바퀴에서 간단하게 빠져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을 때에는 변형이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동적인 상황에서는 쉽게 변형이 일어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유동적인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행운아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기존의 규범과 계율은 무용해졌고, 새로운 틀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곧 새로운 패턴이 형성될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불안정한 상태로 머물 수 없다.
인간은 안정이 없는 상태의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시 모든 것이 자리잡을 것이다.
이 시기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작해야 몇 년뿐이다.
이 시기를 잘 이용하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다른 시대에는 아주 어렵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 2천 5백 년을 기다려야 한다.
삶은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라.
모든 것이 순환한다.
아이가 태어나 젊은이가 되고, 노인이 되고,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이것은 계절이 변하는 것과 같다.
여름이 오고, 우기가 오고, 그 다음에는 겨울이 온다.
의식의 차원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2천 5백 년마다 하나의 원이 완성된다.
새로운 원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을 이용하면 맴도는 수레바퀴에서 탈출할 수 있다.
몇 년 동안 문이 열린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진정으로 보기 드문 꽃이다.
그는 가장 심오한 영혼이며,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에베레스트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모호한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호하지 않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질(質)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모호한 이로 단정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존재의 변화가 필요 없다.
그저 약간의 정보만 있으면 된다.
학교는 논리와 철학에 관한 정보를 준다.
그대는 지적인 정보를 수집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대가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조금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할 뿐이다.
그대의 존재가 변형될 필요는 없다.
그대는 똑같은 상태로 남는다.
다른 차원의 의식이 필요치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는데 이런 조건은 필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명확하다.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충분히 그를 이해할 수 있다.
평균적인 지성을 갖춘 사람은 누구든지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를 이해하는 것은 거칠고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그대가 지식으로 긁어모은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우수한 머리도 도움이 안된다.
전혀 다른 존재의 질이 필요하다.
이것이 어려움이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이해하려면 그대의 변형이 필요하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모호하다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는 모호하지 않다!
다만 그대가 그를 이해할 만한 존재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 존재의 차원에 이르렀을 때, 그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는 가장 빛나는 존재 중의 하나다.
그는 모호하지도 어둡지도 않다.
다만 그대의 눈이 멀었을 뿐이다.
항상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는 "그는 어둠의 베일에 가려 있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리고 그를 대면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변형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를 어둡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의 눈이 멀었다." 또는 "우리가 눈을 감고 있다."고 말하라.
태양이 환히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눈을 감고 서서 태양이 어둡다고 말한다.
때로는 태양 앞에 눈을 뜨고 서 있는데도
빛이 너무 강해서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버리는 수가 있다.
빛을 견디기 힘들다.
이때 갑자기 어둠이 밀려온다.
눈이 열려 있고 태양이 저기 있어도 빛이 너무 강렬해서 어둠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에 해당된다.
실제로 그는 어두운 존재가 아니다.
다만 그대가 장님이거나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또는 제 삼의 가능성도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너무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대의 눈이 멀어 버리는 것이다.
그를 쳐다보는 것은 힘들다. 빛이 너무 강하다.
그대는 이렇게 강렬한 빛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의 말은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마치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 같다.
그는 역설(paradox)을 통해 말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항상 역설을 통해 말한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그들이 어쩔 수 있겠는가?
삶 자체가 역설적인데 그들이 달리 무엇을 하겠는가?
역설을 피하기 위해 그대는 논리 정연하고 분명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은 허구가 될 것이다.
삶과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논리 정연하고 명확하다.
그는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정원과 같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그래서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그는 역설을 배격하고 분명한 이론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날 때 그대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가 역설적인 삶의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붓다와 노자는 역설적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어쩔 수 있겠는가?
삶 자체가 역설적이므로 그들 또한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삶은 논리적이지 않다.
삶은 로직(logic)이 아니라 로고스(logos)다.
삶은 카오스(chaos)가 아니라 코스모스(cosmos)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단어를 사용한다.
로고스와 로직의 차이점 또한 이해해야 한다.
논리는 진리에 관한 이론이고, 로고스는 진리 자체다.
로고스가 실존적이라면 논리는 비실존적이다.
논리는 지적이고 이론적이다.
이것을 이해하라.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 죽음이 함께 있다.
어떻게 죽음을 피하겠는가? 삶은 죽음을 내포한다.
삶의 매 순간이 또한 죽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것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은 두 개의 독립된 현상이 아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깊이 들여다보면,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그대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라면 그대는 죽을 때 다시 살기 시작할 것이다.
삶이 죽음을 함축하고 있다면 죽음은 삶을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귀속된다.
그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삶과 죽음은 두 날개와 같다.
한 쪽 날개로 날 수는 없다.
삶에서 그대는 우익이나 좌익이 될 수 없다.
양쪽 모두가 되어야 한다.
이론에 관한 한 그대는 우익이 될 수도 있고 좌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은 결코 삶과 들어맞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이론은 논리 정연하고 명쾌해야 하는데 삶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은 광대하다.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인 휘트먼(Whitman)은 어디선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에 스스로 모순된다."
논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협소한 마음뿐이다.
논리를 통해서는 광대해질 수가 없다.
만약 모순을 두려워한다면 그대는 광대해질 수 없다.
이때 그대는 선택하고 억눌러야 할 것이다.
모순을 피하고 그것을 감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감춘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겠는가?
죽음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대가 죽지 않겠는가?
그대는 죽음을 회피한다.
등을 돌리고 서서 외면하고 완전히 잊어버리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다.
이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죽음은 날마다 일어난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서둘러서 그를 치워 버린다.
우리는 도시 밖 외딴 곳에 무덤을 만든다.
대리석으로 멋있는 무덤을 만들고 아름다운 비문을 새겨 놓는다.
그리고 가끔씩 꽃을 갖다 놓는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우
리는 죽음마저 장식하려고 한다.
서양에서는 죽음을 감추는 일이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시신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아름답게 분장시키는 직업이 있다.
이것이 죽음을 회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죽음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대는 무덤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무덤을 어디에 만들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쨌든 그대는 무덤으로 갈 것이다.
그대는 이미 무덤으로 가는 중이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무덤으로 가고 있으며,
그대 또한 그 줄에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죽음에서 도망쳐 어디로 가겠는가?
논리는 명백한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명백해지기 위해 논리는 진실을 회피한다.
논리는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다."라고 말한다.
논리는 삶과 죽음이 별개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A는 A이지 결코 B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가 서양 사상의 주춧돌을 이루었다.
그들은 모순을 피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사랑이고, 미움은 미움일 뿐이다.
사랑은 결코 미움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은 그 안에 미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연의 방식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을 피하고자 하면 모든 것이 허구가 될 것이다.
그대의 사랑이 허구로 전락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대의 사랑은 진실하지 않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허울에 불과하다.
왜 그것은 허울인가? 그대가 모순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의 친구이며, 친구는 적이 될 수 없다.
당신은 나의 적이기 때문에 내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적은 잠재적인 친구이며, 친구는 잠재적인 적이다.
다른 면이 잠재해 있다.
어찌되었건 다른 면이 엄연히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양면을 다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만약 친구 안에서 적을 본다면 그대는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적 안에서 친구를 본다면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삶 전체가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삶에 진실할 뿐이다.
이 삶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한다.
그는 삶에 대한 이론이 없다.
그는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지 않는다.
그는 거울과 같다.
삶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대의 얼굴이 변하면 거울이 그 얼굴을 비춘다.
그대가 사랑으로 충만하건 미움으로 들끓건 거울은 그대로 비춘다.
거울은 숨기고 회피하지 않는다.
거울은 진실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울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고정된 사진과 같다.
사진은 변하지 않는다.
사진은 삶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헤라클레이토스에 어떤 결점이 있다고,
그의 인격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논리를 삶의 목표로 삼아야지 상반되는 것들을 마구 뒤섞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누가 그것들을 뒤섞는다는 말인가?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무 것도 뒤섞지 않았다.
삶 자체가 뒤섞여 있을 뿐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삶 자체가 뒤섞여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물론, 책 속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책은 거짓이 될 것이다.
논리적인 진술은 본질적으로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삶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삶에 대한 진술은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
삶 자체가 모순을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을 관찰해 보라. 도처에 모순이 존재한다.
그러니 이 모순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다만 그대의 논리적인 마음이 이 모순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이다.
신비적인 통찰력을 얻은 사람에게 이 모순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아름다움은 모순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면 그 사랑에는 긴장이 없을 것이고,
그 사랑은 죽은 사랑이 될 것이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정체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대는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아침에는 물밀듯이 솟아나던 사랑이 저녁때에는 미움이 된다.
왜 그런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삶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일까?
미워할 때에는 두 사람이 분리된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거리감이 생겨난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두 사람은 별개의 개인이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공동체가 되었다.
이 '공동체(community)'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말이다.
'community'란 단일한 개체(common unity)를 뜻한다.
두 사람은 공동체가 됨으로서 단일한 개체가 되었다.
얼마 동안은 이 공동체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곧 노예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온다.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는 것은 얼마 동안 아름답게 느껴진다.
정상에 오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 정상에 영원히 살 수는 없다.
모두가 정상에 산다면 계곡에는 누가 살겠는가?
봉우리가 아름다운 것은 계곡이 있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다시 내려올 수 없다면 그대의 정상은 아무 가치도 없다.
그것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봉우리에 집을 짓고 산다면 그대는 그곳이 봉우리라는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사랑이라는 봉우리의 아름다움이 사라진다.
아침에 사랑으로 충만하던 그대가 오후가 되면 미움으로 가득 찬다.
이제 그대는 계곡으로 이동했다.
사랑에 빠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제 두 사람은 다시 별개의 개인이 되었다.
개인이 되는 것은 아름답다.
거기엔 자유가 있다.
계곡에 사는 것 또한 아름답다.
그 곳에는 휴식이 있다.
어두운 골짜기에는 편안한 휴식이 있다.
그것이 다시 균형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움의 순간이 지나고 다시 사랑에 빠졌을 때 새로운 허니문(honeymoon)이 시작된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삶은 고여 있는 연못과 같다.
그대가 반대 극으로 움직일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진부하고 지루해진다.
지나치게 세련되고 개화된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항상 웃는다.
결코 화내는 법이 없다.
그들은 모욕을 당해도 웃고, 칭찬을 해도 웃고, 비난을 해도 웃는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역겹다.
그들의 웃음은 위험하다.
거기엔 깊이가 없다.
다만 입술 위에 머무는 표정, 작위적인 표정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웃는 것이 아니다.
규범과 형식을 따를 뿐이다.
그들의 웃음은 추하다.
항상 사랑하면서 미움을 모르는 사람들, 화내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매우 표피적이다.
반대 극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깊이를 얻겠는가?
깊이는 반대 극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온다.
사랑은 미움이다.
사실, 사랑과 미움이라는 단어를 따로 써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랑미움'이라는 한 단어를 써야 한다.
사랑의 관계는 곧 사랑미움의 관계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현상이다.
미움에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미움을 통해 사랑을 얻는다.
화를 내는 것은 아무 잘못도 없다.
우리는 분노를 통해 고요한 평화에 도달한다.
이것을 관찰해 보았는가?
이 곳에는 아침마다 비행기가 큰 소리를 내면서 지나간다.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에 깊은 침묵이 뒤따른다.
비행기가 오기 전에는 그렇게 고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에는 더 고요해진다.
어두운 밤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차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온다고 하자.
그 차가 지나갈 때 그대는 불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그리고 차가 지나간 다음에는 전보다 더 어두워진다.
대립을 통해, 반대되는 것과의 긴장을 통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더 깊어진다.
멀리 달아나면 더 가까이 올 수 있다.
반대쪽으로 움직이면 다시 이 쪽으로 더 가까이 올 수 있다.
사랑은 계속되는 허니문의 관계를 말한다.
허니문이 끝나고 모든 것이 안정되면 그것은 이미 죽은 사랑이다.
안정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삶은 안정이 없는 움직임을 통해 유지된다.
안전한 것은 이미 무덤 속에 묻힌 것과 같다.
예금 통장이 그대의 무덤이다.
예금 통장 안에서 그대는 이미 죽어 있다.
만약 그대가 철저하게 안전한 위치에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서 이동하는 것을 뜻한다.
질병은 나쁘지 않다.
그대는 질병을 통해 다시 건강을 회복한다.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이라고 불린 까닭이다.
노자는 그를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그리스 사상이 서양 전체의 기반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가장 깊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고정된 사물(thing)을 믿지 않았다.
그가 믿은 것은 과정(process)이었다.
그에게는 '과정'이 신이다.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세상에 고정된 사물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삶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삶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과 같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발을 담글 때쯤이면 강물은 이미 이동했다.
강물은 하나의 흐름이다.
똑같은 사람을 두 번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들은 어제 아침에도 여기에 왔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똑같은 사람인가? 내가 똑같은 사람인가? 양쪽 모두 변했다.
두 강 모두 흘러갔다.
그대들은 내일도 이 자리에 나오겠지만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을 것이다.
삶은 변화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변화만이 변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변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원한 순환을 믿는다.
모든 것이 순환한다.
그것이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대가 지금과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과정을 뜻한다.
그대는 한 곳에 머물 수 없다.
아무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히말라야 같은 산들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산도 태어났다가 죽는다.
히말라야는 세상에서 가장 젊은 산 중의 하나다.
지금도 자라고 있다.
히말라야는 아직 최정상에 이르지 못했다.
히말라야는 아주 젊다.
지금도 해마다 1피트씩 자라고 있다.
반면, 최정상에 도달하여 지금은 허리가 굽어지고 있는 산도 있다.
그대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벽을 보라.
벽 속의 분자는 움직이고 있다.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움직임이 아주 미묘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이제 물리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에 동의하고 있다.
과학은 실체에 더 접근할수록 노자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동의하게 되어 있다.
이제 물리 학자들은 모든 것이 움직임 속에 있다고 말한다.
에딩톤(Eddington)은 '휴식'을 허구적인 단어라고 말했다.
아무 것도 휴식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휴식'은 거짓된 단어다.
이 단어는 어떤 실체와도 대응하지 않는다.
'이다(Is)'는 그저 언어일 뿐이다.
이 삶 속에, 이 존재계에 '이다'는 없다.
모든 것이 되어 가는 과정(becoming) 속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강물은 아주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강물뿐만 아니라 그대 또한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대는 겉으로만 같은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강물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대 또한 변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이 붓다를 모욕했다.
그는 붓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붓다가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더 말할 것이 남았는가?"
이 남자는 당황했다.
이런 식의 반응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갔다가 다음 날 다시 찾아왔다.
그는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찾아와
붓다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저를 용서하십시오."하고 말했다.
붓다가 말했다.
"이제 누가 그대를 용서한단 말인가?
그대가 침을 뱉었던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침을 뱉었던 그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용서하겠는가? 잊어라.
이제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일은 끝났다.
양쪽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죽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도 새로운 사람이고 나도 새로운 사람이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가장 심오한 메시지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
아무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집착하는 순간 그대는 실체를 놓친다.
그대의 집착이 문제를 일으킨다.
실체는 변하는데 그대는 그것을 고정시키려고 한다.
어제는 나를 사랑하던 그대가 지금은 내게 화를 낸다고 하자.
내가 어제에 집착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어제 그대는 나를 사랑했다.
그대는 항상 나를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어제 그대가 한 말, 항상 나를 항상 사랑하겠다던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약속도 아니었다.
그저 그대의 기분이 그랬을 뿐이며 나는 그대의 기분을 과신(過信)했다.
영원히 나를 사랑하겠다던 그대의 느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 순간에는 기분이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 기분은 사라졌다.
그렇게 말했던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간 것은 간 것이다.
이제 그 일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불행이 싹튼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시오!"하고 말한다.
부인은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 해요.
내게 구애할 때 한 약속을 잊었나요?"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 중의 한 사람도 없다.
그대는 스무 살의 젊은이였다.
지금도 그대가 똑같은 사람인가? 많은 것이 변했다.
갠지스 강물은 멀리 흘러갔다.
스무 살의 젊은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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