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시 3-4
바울의 노래4
그대는 사랑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방법을 묻지 말라.
그대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지도를 요구하지 말라.
그 요구자체가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trust)이 필요한 이유이다.
만일 그대가 어떤 사람을 믿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다! 그대가 나를 어둠 속으로 보낸다면 나는 기꺼이 가겠다.
그대가 나를 죽음속으 로 몰아넣는다해도 나는 기꺼이 갈 것이다."
사랑의 길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명상의 길은 복종이 없이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길에서 믿음과 복종이 없다면 그대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첫번째 관문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처음부터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쉽지만 매우 요구적이다.
사랑의 길이 매우 쉬움에도 불구하고 그 길위를 여행하는 사람이 극소수인 것은 그때문이다.
명상의 길은 매우 험난하다.
그러나 그렇게 요구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명상의 길을 간다.
그 길이 매우 어렵고 험난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랑에 관해 들을 때,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 요구조건들을 관찰해 보라.
명상의 길에서 마지막에 요구되는 것이 사랑의 길에서는 처음부터 요구된다.
명상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에고를 버리도록 요구받는다.
마음의 단계에서 무심(無心)의 단계로 나아갈 때,
그 마지막 단계에서만 그는 에고를 버리도록 요구받는다.
먼저 그는 마음과 에고를 깨끗이한다.
그는 계속해서 그것을 민감하게 만들고 정화시킨다.
그 다음엔 흔적만이 남는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그 흔적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처음부터 에고를 떨쳐버리라고 말한다.
에고를 정련시킬 필요가 없다.
에고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에고는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에고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당장 그것을 떨쳐 버리라.
명상의 길에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마지막 순간이다.
믿음은 그대가 거의 집에 도달했을 때에야 비로소 생겨난다.
목적지가 코 앞에 있고 문이 눈 앞에 보일 때,
그대가 도달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믿음이 생겨난다.그
때가 되어서야 그대는 `예스(Yes)'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길에서는 처음부터 믿음이 요구된다.
사랑의 첫 단계는 명상의 마지막 단계와 같다.
만일 그대가 용기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무모한 용기를 갖고 있다면 사랑의 길은 매우 쉽다.
그대가 거의 미쳐있고 아무 조건도 없이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사랑의 길은 아주 쉽다.
왜냐하면 첫 단계에서부터 그 길은 완성되기 때문이다.
첫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된다.
지금 여기에서 복종할 때,그대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나 다름없다.
.... 다른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리라.
지적인 이해의 길을 가는 사람들,
사색과 집중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들은 사랑의 언어를 전혀 알지 못한다.
라임오렌지의 맛은
열매의 중심부에 숨어있다.
숙련된 사람조차도
거기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리라.
바울이 말하는 이 사랑은,
아니 말한다기 보다는 노래하고 춤추는 이 사랑은 그대 존재의 핵심부에 숨어 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다만 자신의 가장 내적인 중심, 아드하르 마누쉬(Adhar Manush),
즉 본질적 인간에 도달하는 길을 찾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그대가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이미 거기에 있다.
사랑은 그대가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신의 선물로 이미 그대에게 주어졌다.
그대가 창조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사랑이라는 보물은 이미 그대 손에 넘겨졌다.
그대는 숨쉬지 않고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랑은 바로 영혼의 호흡이다.
바울은 말한다.
"육체가 숨쉬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듯이 영혼은 사랑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알든 모르든 사랑은 그대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샘솟고 있다.
사랑은 거기에서 고동치고 있다.
그것은 심장의 박동과 같다.
그대는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보물을 찾아 밖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보물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며 그대의 것이 될 수도 없다.
그것이 바울이 거지처럼 살아가는 이유이다.
바울은 말한다.
"나는 다른 보물을 찾지 않는다.
나는 나자신으로 충분하다.
나의 보물은 엄청나다.
나의 왕국은 이미 여기에 있다."
바울은 거지처럼 산다.
그러나 바울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면,그
대는 그가 왕처럼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왕조차도 바울만큼 축복된 삶을 살지 못한다.
바울의 전생애는 축복으로 가득하다.
그는 축복 이외의 다른 맛을 알지 못한다.
그는 고통과 불안을 모른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우아함을 갖고 미지의 차원에서 산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지만 모든 것을 갖고 있다.
그는 아무 것도 소유한 게 없지만 온 세상이 그의 것이다.
바울은 노래한다.
하늘의 거울은 내 영혼을 비춘다.
오,길 위의 바울이여,
오,바울,나의 가슴이여!
하늘의 거울은 내 영혼을 비치나니.
오,무감각한 나의 가슴이여,
그대는 인간의 대지를 경작하지 않았도다.
경작했다면,황금의 수확을 거둘 수 있었으련만.
삶과 마음,그리고 눈이 일치할 때,
표적은 그대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나니.
그대는 투명한 눈을 갖고 형상없는 자를 볼 수 있다.
"삶과 마음,그리고 눈이 일치할 때,
"-그것이 내면을 발견하는 길이다.
그대가 일치 안에 있을 때,
그대의 내면에 갈등이 없을 때,-
그것이 길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갈등없는 존재,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대의 내면에 어떠한 분별도 만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집에 도달할 수 없다.
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일치와 조화가 요구된다.
그대가 조화를 이룰 때,문은 저절로 열린다.
삶과 마음,그리고 눈이 일치할 때,
표적은 그대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나니.
그대는 투명한 눈을 갖고 형상없는 자를 볼 수 있다.
그의 내면에 깊은 일치가 일어날 때, 하나의 바울이 완성된다.
그의 노래와 춤은 자기 자신과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는 춤추는 사람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가끔씩 그대는 춤추는 그대자신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춤은 조화 안에 용해될 수 있는 가장 예민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대의 몸과 마음, 영혼은 춤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춤은 가장 영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춤춘다면, 생각은 불가능하다.
진정으로 춤출 때,육체는 춤에 몰입하고 모든 에너지가 유동적인 흐름을 시작한다.
그때, 춤추는 자는 고정적인 형상, 고체적인 성질을 벗어난다.
그는 하나의 운동이며 흐름이 된다.
그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는 운동이며 에너지이다.
그는 용해된다.
위대한 무용수는 서서히 녹아 없어진다.
그는 에고를 보존할 수 없다.
에고를 보존할 때, 그의 춤에는 어색하고 껄끄로운 동작이 포함될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무용수는 춤 안에서 에고를 포기한다.
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그때, 문이 열린다.
그대는 하나의 유기적인 단일체(unity)이기 때문이다.
이제 영혼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육체와 마음 또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이 뒤섞이고 서로의 안으로 녹아든다.
니진스키(Nijinsky)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위대한 무용수이다.
그는 높이 점프했다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서서히 떨어지곤 했다.
가끔씩 그런 일이 있었다.
그는 깃털처럼 서서히 떨어지곤 했다.
그는 마치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미쳐갔다.
그는 하나의 바울이 된 것이다.
그는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고 있는 미치광이 중의 한 명이다.
그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서양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혔고 전기충격요법과 인슐린 주사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가 동양에 살았다면, 그는 가장 위대한 바울의 대열에 들었을 것이다.
그의 광기는 치료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질문 받았을 때,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사라졌을 때에만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내'가 있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시도한 바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시도해 봤지만
`내'가 있는 한 그런 현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간단하게 그 일이 일어난다.
나는 누가 점 프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사라질때에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도 그와 같다.
춤추면서 그대가 하나의 돌풍이 될 때, 서서히 그대는 사라진다.
그대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무너져 내린다.
장벽과 경계가 사라지고 그대는 하나의 단일체(one unity)가 된다.
엄청난 오르가즘이 그대의 존재를 뒤덮는다.
그 순간, 그대는 존재계와 조화를 이룬다.
그 순간이 바로 선(禪)에서 말하는 사토리(satori)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순간을 맛보는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다.
선은 오랜 세월동안 매진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느린 과정이다.
그것이 명상의 길이다.
바울은 훨씬 더 쉽게 그 경지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에고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결심하는 그 날부터
그대는 신을 손에 넣을 수 있다.그
리고 신은 그대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돌연 비본질적인 것을 뚫고 본질적 인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갑작스런 변형이 일어난다.
그 순간, 그대는 사랑으로 가득차고 사랑이 그대의 에너지가 된다.
그대와 사랑은 하나가 된다.
그 순간 그대는 모든 존재를 찬미할 수 있다.
그대의 내면에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비밀이다.
그대 내면의 모든 갈등을 떨쳐 버리라.
그러면 존재계와 그대 사이의 갈등 또한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내면에서 하나가 되라.그러면 그대는 존재계와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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