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시 3-3
바울의 노래3
복종,
그것이 지혜의 비밀이다.
바울에게는 복종이 유일한 지혜이다.
그대는 베다(veda)를 읽을 수 있다.
읽는데에는 복종이나 굴복이 필요 없다.
그대는 굴복하지 않고도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대는 매우 박식한 대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에 관한 한,복종이 없는 지혜는 있을 수 없다.
복종이 있어야만 진정한 지혜가 싹틀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지혜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지혜에 대한 바울의 기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만일 우리가 산야신(sannyasin)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려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당신의 말을 좋아하고 귀기울여 듣습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면 안됩니까?"
나는 말한다.
"그대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거기에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대는 표면적인 것만을 모을 것이다.
그대는 나의 말들을 수집할 것이다.
그대는 식탁 위에 떨어진 부스러기만을 긁어모을 것이다.
그대는 나의 손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비본질적인 것만을 갖게 될 것이다.
선택은 그대에게 달려있다."
일단 그대가 굴복하고 나면, 그대와 나 사이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가슴끼리의 교류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나의 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듣게 될 것이다.
그대는 깊은 사랑과 감사와 수용적인 태도로 내 말을 듣는다.
그때, 나의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그 말들은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그대는 깊은 수용성으로 나의 말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잉태한다. 그때, 변형이 일어난다.
말은 단지 구실일 뿐이다.나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대에게 준다.
그때, 그대에게 가 닿는 것은 말뿐이 아니라, 나의 가슴을 통해 전달되는 어떤 분위기이다.
만일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대와 나 사이엔 전혀 다른 방식의 이해가 있게 된다.
그러나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그대는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다른 혹성에 있다.
나는 소리칠 것이고 그대는 몇마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론 아무 것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그대는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더 많은 존재를 가져야 한다.
만일 그대가 여기에 나와 가까이 있음으로 해서 더 풍요로워진다면 그대의 존재가 성장을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더욱 더 진정한 인간이 되고 생동감에 넘치며, 더 신성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복종(surrender)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에고의 굴복이다.
복종이란 그대가 아는 모든 것, 그대의 지식, 마음, 지성의 굴복이다.
복종은 자살, 과거의 자살이다.
만일 그대가 은밀한 방식으로 과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대의 산야스(sannyas)는 아무 힘도 발
휘할 수 없다.
그대는 산야스를 받은 후에도 그대의 과거를 무슨 보물처럼 숨기고 보호한다.
그때, 그대는 겉으로만 산야신(sannyasin)일뿐, 나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다.
그로인해 그대가 자신을 성취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대의 책임일 뿐, 다른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본질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것이 바울의 첫번째 관점이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기도합니까?"
예수가 대답했다.
"기도하라."
그가 다시 말했다.
"제가 그걸 묻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기도하는 법을 모릅니다."
예수가 말했다.
"내가 기도할 것이니 그대는 옆에 앉아서 같이 기도하도록 하라."
어떻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기도는 이해될 수 있지만 가르쳐질 수는 없다.
만일 그대가 가슴을 활짝 열고 나를 대한다면, 그대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가르쳐질 수 없다.
기도는 전염병과 같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경험될 수 있지만 가르쳐질 수는 없다.
사랑은 그대를 둘러싸고 흐른다.
그러나 그대는 문을 꼭 걸어닫고 외딴 섬처럼 남아 있다.
그때,그대로 하여금 사랑을 알게하는 방법은 없다.
바울은 노래한다.
신은 그대의 사원을 떠났다,
그대가 소라껍질로 피리를 불고
종을 울리며 놀고 있을 때.
사원과 모스크(mosque)에 의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막혔나니.
나는 듣는다,
"신이여,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대가 신을 부르는 소리를.
스승과 선생은 길을 막고 있다.
신은 그대의 사방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대는 경전과 지식,에고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내면에는 신이 거주할 공간이 없다.
신은 그대를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 이유는 그대 때문이다.
예수는 말한다.
"기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거든 기도하라."
예수의 말은 옳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한다.그들의 말 또한 옳다.
"어떻게 기도합니까? 그것이 나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다시 말한다.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가슴을 활짝 열고 주의깊게 내 옆에 앉아 있으라.
어쩌면 그대는 그것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다.가슴을 열고 나를 대하라.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대의 에고를 옆으로 밀어두라.
에고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그대의 본질, 그대의 정수로 파고들게 하라.
그때,돌연 그대는 새로운 불꽃이 그대 안에 솟구침을 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랑이 태어난다.
그렇다! 복종이 지혜의 비밀이다.
복종은 지혜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것은 지적인 노력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이다.
그대자신을 용해시키는 것이다.바울이 사랑을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랑은,사랑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를 타지 않고도 운전을 배울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그대는 다만 모형 차안에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벽면에 화면이 나타난다.
길이 움직이고 거리가 지나간다.
그대는 마치 거리에서 운전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대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화면에서 길이 움직인다.
그대는 길이 구부러지는대로 핸들을 꺾으면 된다.
그대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코치가 알려준다.
그것은 더 안전한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는 매트리스 위에 가만히 누워서도 수영을 배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대는 화면을 보면서 수영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최소한 그대는 기초적인 지식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배우려고 영화를 본다.
음란소설을 보고 사랑을 알려 한다.
사랑을 알기 위해 소설이나 시를 읽고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를 읽는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다.
사실, 사랑에 관해 많은 정보를 갖게 될수록 직접 사랑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진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갖고있는 정보대로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을 연기하는 영화배우들이 실제로는 거의 사랑에 실패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마릴린 몬로처럼 유명한 배우도 자살했다.
그녀는 인기 절정의 일류배우였다.
미국의 대통령인 케네디조차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전세계가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공허했다.
그녀는 인기절정에 있을 때 자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배우들은 항상 사랑에 실패하는가?
그들은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실하게 사랑을 대할 수 없다.
그들은 무대위에서처럼 삶속에서도 연기를 계속한다.
무대 위에서라면 그들의 연기라면 훌륭하다.
그러나 삶속에서 그것은 공허한 몸짓일 뿐이다.
명심하라.
그대는 사랑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대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 안에 뛰어 들어야함을 의미한다.
사랑에 용기가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대는 지도나 안내원, 횃불도 없이 어둠 속에 뛰어 들어야 한다.
그대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또는 길을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수렁속에 빠져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둠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은 매우 용기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언어,
사랑의 여러가지 맛을 아는 자만이
그 언어를 이해하리니....
사랑은 여러가지 맛을 갖는다.
사랑에는 여러가지 차원이 있으며 여러가지 미묘한 차이들이 있다.
사랑은 단일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엄청날 정도로 다양한 측면을 갖는다.
사랑은 다이아몬드처럼 많은 면을 갖는다.
그 모든 면들이 사랑의 다양함을 더해준다.
그대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랑은 하나의 단어이다.
그러나 고대언어에는 사랑이라는 의미로 여러 단어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영어는 매우 빈약한 언어이다.
그대는 차를 사랑하고 여자를 사랑한다.
그대는 집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한다.
이 모든 게 하나의 단어로 통한다!
영어는 매우 빈약하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사랑은 틀리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열정이 없다.
대신에 깊은 존경과 감사가 있다.
그러나 연인에 대한 사랑에는 강렬한 열정이 있다.
그것은 거의 광기와 같다.
그러나 그대는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친구를 사랑한다.
그 사랑 또한 틀리다.
유심히 관찰한다면, 사랑에서 많은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뒤에는 많은 단어가 숨어 있다.
그대는 사랑의 모든 차원을 여행함으로써 사랑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단 하나의 측면이라도 빠뜨린다면 그대의 이해에는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사랑의 모든 측면과 미묘한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울의 노래가 의미하는 바이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언어,
사랑의 여러가지 맛을 아는 자만이
그 언어를 이해하리니,
다른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리라.
그렇다. 그것은 언어이다.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완벽한 언어이다.
일단 그것을 알고나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의 손을 친구처럼 만질 수 있다.
그때, 그 감촉은 다른 맛을 가질 것이다.
또한 그대는 연인처럼 어떤 사람의 손을 만질 수도 있다.
그때, 그 감촉은 또 다른 맛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랑의 여러가지 맛을 아는 전문가, 그는 눈을 감고도 그대의 손을 느낄 수 있고 그 언어를 이해한다.
이런 경우를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욕정을 품고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즉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이 깊은 사랑을 갖고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또 친구가 깊은 정을 갖고 그대를 볼 때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대는 그 미묘한 차이점들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기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연민(compassion) 또한 많은 층(layers)을 갖기 때문이다.
붓다의 연민은 전적으로 다른 질(quality)을 갖는다.
그대의 연민은 연민이라기보다는 동정(sympathy)에 가깝다.
그러나 붓다의 연민에는 전혀 동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자비이다.
붓다가 그대에게 사랑을 뿌려줄 때, 그것은 그대가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르다.
붓다만이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있다.
붓다의 사랑에는 열정이 없다.
그것은 매우 냉정하다.
그것은 뜨겁지 않다.
그러나 따뜻하다.
그러면서도 냉정하다.
붓다의 곁에 가까이 있을 때,그 사랑은 그대를 차갑게 식혀 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하도록 도울 것이다.
붓다의 사랑은 그대 안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감정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우고 그대를 진정시킬 것이다.
그것은 미묘한 분위기로 그대를 둘러싸고 진정시킬 것이다.
그것은 자장가같을 것이다.
그대는 엄마 품에 안긴듯이 잠이 옴을 느낄 것이다.
붓다의 분위기에는 엄마와 아빠, 연인, 그리고 어린아이의 어떤 요소들이 깃들어 있다.
거기에는 모든 뉘앙스(nuance)가 포함된다.
그 안에는 사랑의 모든 차원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붓다의 곁에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의 모든 맛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같을 것이다.
어떤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그대는 그와 더불어 놀 수 있다.
그의 미소는 어린아이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그대는 엄마처럼 그를 돌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붓다가 엄마이고 그대는 아이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때는 그가 연인처럼 느껴질 것이고 그대는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제쳐두고 오로지 그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저 친구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붓다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대 때문이다.
그대의 관점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기 때문에 붓다의 이미지가 변하는 것이다.
그대의 눈은 아직 전체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고 시시각각 일부분만을 본다.
그대는 붓다의 전체성(totality)을 볼 수 없다.
어떤 순간,그대는 그의 한면을 본다.
그리고 다른 순간에는 다른 면을 본다.
왜냐하면 그대는 전체(the whole)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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