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시 3-2
바울의 노래2
죽음이 닥쳐와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잘 익은 열매와 같다. 
익은 열매는 망설임없이 대지에 떨어진다. 

죽음이 찾아들 때, 그대는 두려워 할 것이다. 
그대는 이미 두려워 하고 있다. 
그대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직까지 충분히 살지못했다. 
그런데 죽음이 찾아온다.
그대는 아낌없이 살지 못했다. 
그런데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죽음을 환영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어느 순간에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는 삶의 단 한 순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능한 한 깊고 철저하게 살았다.그는 아무 불만도 없다.
그는 자신의 삶에 여한이 없다. 그는 아무 것도 기다릴 게 없다. 
그러므로 죽음이 온다해도 그는 죽음조차 즐길 것이다. 
그는 죽음을 껴안고 "어서 오게나"하고 말할 것이다.
그는 당당한 주인처럼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제쳐두고 뭔가 다른 곳에서 헤맸다면, 
삶을 즐기지 못하고 질질 끌리듯이 살아왔다면 당연히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다. 
그대는 죽음 앞에서 겁장이처럼 부들부들 떨 것이다.

바울은 춤추고 노래하며 죽는다. 바울은 악기를 연주하며 죽음을 맞는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안다. 
그는 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드하르 마누쉬, 그 안에 거주하는 본질적 인간이다. 
그는 본질적 인간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탐구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그의 중심적인 과제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매우 존중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저마다 본질적인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을 갖춘 모든 사물은 형상없는 본질성에서 유래한다. 
모든 물결은 바 다에 속한다. 
바울은 모든 사물을 더 없는 존경으로 대한다. 
그는 아무 것도 비난하지 않는다. 
비난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사람, 나에 관한 한 이것이 종교적인 사람의 기준이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의 세계에는 모든 것이 수용된다. 
아무 것도 배척되지 않는다.
섹스가 수용되는가하면 깨달음 또한 수용된다. 
그의 세계는 매우 풍요롭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이 근원의 세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부정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그것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근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을 부정할 때,그대는 거기에 집착한다. 
그대는 거기에 멈춘다. 
그때, 그대는 근원의 세계를 향해 여행할 수 없다.
바울은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바울이 방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더 근원적이고 고양된 것으로 변형시키는 연금술을 안다.
그는 쇠를 황금으로 변형시키는 법을 안다.
그는 섹스를 사마디(samadhi)로 변형시키는 법을 안다. 
그는 연금술의 비밀을 안다.이 삶을 영원한 삶으로 변형시키는 비밀은 무엇인가? 
시간을 영원으로 변형시키는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섹스와 사마디를 이어주는 다리가 사랑이다.

사랑은 섹스와 사마디 양쪽에 걸쳐있다. 
사랑은 다리이다. 
한쪽 둑은 섹스이고 다른 쪽 둑은 사마디이다. 
사랑은 둘다를 포함한다. 
바울은 사랑을 통해 영원의 집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유일한 길이다.  
사랑이 바울의 기도이이며 명상이다. 
바울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그는 무한한 사랑으로 흘러 넘친다.
 
인도에는 두 갈래의 전통이 있다. 
하나는 베다(Veda)이며, 다른 하나는 탄트라(Tantra)이다. 
베다는 형식과 율법을 중요시한다 베다는 사회적이고 조직적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형식과 율법,관습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탄트라는 사회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이다. 
형식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이고 영적이다.
 
베다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많은 것이 배제된다. 
베다는 청교도적이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청교도적이지 않다.
탄트라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 
그러므로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다. 
탄트라는 모든 것이 이용되어야 하며, 아무 것도 부정할 게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베다보다 탄트라에 더 가깝다. 
탄트라는 남성적이 아니라 여성적이다. 
베다는 남성지향적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더 여성적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수용적이다.
남성은 여성에 포함된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남성은 분화된 종(種)처럼 보인다. 
여성은 더 부드럽고 유동적이며 둥글다. 
탄트라는 여성의 길이다.

그러나 바울과 탄트라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바울은 탄트라를 개선해 왔다.
탄트라는 너무 기술적이다.
탄트라라는 단어 자체가 기술을 의미한다. 
탄트라는 딱딱하고 과학적이다. 
그러나 바울은 부드럽고 시적이다.

탄트라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섹스를 사용한다. 
이 `사용'이라는 말에 유의하라. 섹스는 도구가 된다. 
바울은 그것이 매우 존경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어떻게 에너지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은 섹스를 존중한다. 
그들은 섹스를 기술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섹스를 사랑한다. 
그 사랑을 통해서 저절로 변형이 일어난다.
  
탄트라에서 그대는 중립적인 자세를 지켜야 한다. 
섹스를 사마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때, 그대는 섹스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대는 제 삼의 목격자처럼,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처럼 관찰자로 남아야 한다. 
실제로 탄트라는,사랑하는 연인과는 탄트라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랑이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너무 집착할 것이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탄트라 수행자는 사랑하지 않는 여성을 대상으로 찾는다. 
그것은 관찰자의 태도를 완벽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탄트라와 바울의 다른 점이다.  바울은 그것이 너무 무정한 짓이라고 말한다. 
아무 열정도 없는 그런 행위는 너무나 비인간적이라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렇게 어렵고 비인간적일 필요가 없다. 사랑을 통해서 변형이 가능하다. 
그것이 내가, 바울이 더 시적이고 인간적이며 가치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바울은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세상 안에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대는 한 여인을 사랑하면서도 관찰자가 될 수 있다. 
그대는 시장 바닥에 있으면서도 초월의 세계를 향할 수 있다. 
그대는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생각도 이와 같다. 
세상 안에 살라. 
그러나 세상에 물들지 말라. 이것이 나의 산야스(sannyas)가 의미하는 바이다.

사랑으로 행해지지 않는 일은 아무 가치도 없다. 
이것이 탄트라에 결여되어있는 부분이다. 
탄트라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없다. 
만일 그대가  여성을 사랑한다면 탄트라는 불가능하다. 
그대가 남성을 사랑한다면 탄트라는 불가능하다.
그대는 완전히 초연하고 무관심 해야 한다. 
그때,섹스는 매우 과학적인 것이 된다. 
섹스는 하나의 기술이 된다. 
그것은 그대가 완전히 용해되는 희열의 바다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의 차원에 머문다. 
사마디를 원하기 때문에 남자 또는 여자와 뭔가를 한다는 생각, 
하나의 도구 또는 수단으로써 타인을 이용한다는 생각은 매우 추하고 비도덕적이다.

바울은 탄트라와 전혀 다른 향기를 갖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그렇게 무정할 필요가 없다. 타인을 도구로 삼을 필요가 없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앞으로 나올 시들은 여러 바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겠다.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비젼(vision)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시들은 제각기 다른 단어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똑같은 물결을 타고 흐른다. 
그것은 여러가지 꽃들로 엮어진 화환과 같다. 
그 꽃들은 하나의 끈으로 엮어졌다. 
우리는 그 하나의 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들이 누구의 작품인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많은 시들이 무명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진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의 시들은 글씨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글씨를 모른다. 
어쩌면 그로 인해 그들이 그토록 순수한지도 모른다.
 그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교육받고 문명화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순진무구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다. 
그들은 무식하고 가난하지만 매우 진실하다. 
나는 이 시들을 노래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 노래들은 똑같은 비젼에서 나온 것이다. 
그 노래들은 특정한 멜로디를 갖는다. 
그것은 바울수르(Baulsur), 즉 바울의 멜로디라고 불려진다.

바울의 노래는 독특한 맛과 개성적인 향기를 지닌다.
노래를 들을 때,그대는 금방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들의 노래는 독자적인 개성과 스타일을 갖는다. 
그들의 노래는 세련되지 못하고 문화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매우 개성적이다.
바다 어느 곳에서나 짠 맛을 볼 수 있듯이 그대는 이 노래들이 똑같은 비젼과 태도, 똑같은 열정, 
똑같은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결코 쓴 적이 없다. 
그들은 수세기동안 그 시들을 노래해왔을 뿐이다. 
각각의 바울이 어떤 것을 빼거나 더해 왔다. 
그들은 자신의 노래를 만들거나,스승에게서 들은 노래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들의 비젼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러므로 바울의 노래를 들을 때, 그대는 그것을 놓칠 수 없다.

	여기 첫번째 노래가 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언어,
	사랑의 여러가지 맛을 아는 자만이
	그 언어를 이해하리니,
	다른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리라.
	
	라임오렌지의 맛은
	열매의 중심부에 숨어있다.
	숙련된 사람조차도
	거기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리라.
	
	꿀은 연꽃 속에 숨어 있다.
	그러나 꿀벌은 그것을 안다.
	
	말똥풍뎅이는 꿀을 외면하고
	똥 위에 내려 앉는다.

	복종,
	그것이 지혜의 비밀이다.

사랑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 뿐이다.  
사랑은 지적인 토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사랑으로부터 이론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랑은 영원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직접 행동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것이 바울의 첫번째 관점이다.
 
만일 수영하는 법을 모른다면 그대는 수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대는 수 많은 수영선수들을 찾아가 수영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수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대는 강에 뛰어들어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나는 수영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는 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논리이다.
-"수영하는 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물에 들어가란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먼저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그 다음에야 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대는 결코 수영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선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한다. 
수영은 수영함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사랑함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직접 뛰어들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철학,이념,교리등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허구적인 것이다. 
실제적인 것은 직접 뛰어들어 경험해야만 알 수 있다. 
그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용기를 갖고 대범하게 뛰어들어야 한다.

사랑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에고가 사라져야 한다. 
사랑하는 것은 잃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를 지배할 힘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되는 것이다. 
사랑은 곧 복종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