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시 3-1
바울의 노래1
바울의 세계를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나는 바울의 세계로부터 그대가 자양분을 얻고 풍요로워지기를 희망한다.
바울은 매우 낯설고 비정상적인 세계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바울의 세계는 비정상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사실,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계는 비정상적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세계에서 정상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만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세상의 일반적인 길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바울은 미친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Baul)이란 말의 산스크리트 어원은 바툴(vatul)이다.
바툴은 <미친>,<바람에 매혹된>이란 의미이다.
바울은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힌두교인도 아니고 불교인도 아니며,기독교인이나 모하메드교인도 아니다.
바울은 다만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종교는 전체적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다.
다만 자기자신에게 속할 뿐이다.
바울에게는 국가도 종교도 경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혁명정신은 선사(禪師)들보다 더 깊다.
왜냐하면 선사들은 적어도 형식상으론 불교인이며 붓다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선사들도 경전을 갖는다.
그것이 경전을 버리라고 말하는 경전이라 할지라도 경전은 경전이다.
적어도 선사들은 불태울 몇 권의 경전을 갖는다.
바울에게는 경전이 없다.
그들에겐 불태울 경전조차 없다.
또한 사원도 없다.
바울은 항상 길 위에 산다.
그들에겐 집이 없다.
주소도 없다.
신이 유일한 주소이며 하늘이 그들의 움막이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애크타라(aektara)라고 불려지는 외줄악기와,반구형의 작은 북,
그리고 담요 한장이 전부이다.
그들은 한 손으론 악기를 연주하고 다른 손으론 북을 두드린다.
그들은 몸에 북을 매달고 춤춘다. 그것이 그들 종교의 모든 것이다.
춤이 그들의 종교이고 노래가 곧 그들의 찬양이다.
그들은 신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이라는 말 대신에 `아드하르 마누쉬(Adhar Manush)'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의미는 `본질적인 인간'이라는 뜻이다.바울은 인간을 찬양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본질적인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그 본질적인 존재,아드하르 마누쉬를 발견하는 것이 탐구의 전부이다.
신은 그대의 내면을 제외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원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이미 신의 사원이기 때문이다.
모든 탐구는 내면을 향한다.
노래와 춤의 물결을 타고 바울은 내면을 향해 흐른다.
바울은 노래부르며 거지처럼 떠돈다.
그는 설교하지 않는다.
시가 곧 그의 설교이다.
그리고 그의 시는 보통 시가 아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시를 짓지 않는다.
그가 노래하는 것은 그의 가슴이 노래하기 때문이다.
시는 마치 그림자처럼 바울의 뒤를 따른다.
그러므로 바울의 시는 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그는 시를 계획하거나 짓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의 시대로 살 뿐이다.
시는 바울의 열정이며 삶 자체이다.
바울의 춤은 거의 비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춤추기 위해 어떤 훈련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춤의 기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춤춘다.
그는 바람처럼 맴돈다.
그의 삶은 즉흥적이다.
바울은 말한다.
"아드하르 마누쉬, 즉 본질적 인간에 도달하기 원한다면 사하자 마누쉬(Sahaja Manush),
곧 즉흥적 인간을 통해 가는 것이 그 길이다."
본질적 인간에 도달하려면 그대는 즉흥적 인간을 통과해야 한다.
즉흥성은 본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울고 싶을 때 운다.
그대는 길거리에 서서 아무 이유없이 울고있는 바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왜 우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웃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유는 없다. 나는 울고 싶다. 그래서 운다."
만일 웃고 싶다면 그는 웃는다.
그는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고 , 춤추고 싶을 때 춤춘다.
그러나 그의 모든 행동은 깊은 느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의 행동은 인위적으로 조작되거나 훈련된 것이 아니다.
그는 형식을 모른다.
그는 형식에 절대 반대한다.
그는 "형식화된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형식적인 인간은 즉흥적이고 자발적이 될 수 없다.
형식과 율법을 추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많은 습관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깊게 깨어있을 필요가 없다.
그는 습관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형식을 따름에 의해 주의깊음이 상실되고 습관이 형성된다.
형식을 따르는 사람은 사원에 가서 무릎을 꿇는다해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다만 그렇게 행동하도록 배워왔다.
그는 자신이 배운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행동하도록 세뇌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형식과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
바울에게는 기교와 습관이 없다.
그러므로 비슷하게 행동하는 두 명의 바울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각기 다른 개인이다.
그들이 가진 혁명정신은 그들을 진정한 개인으로 이끈다.
이 점을 이해하라.
사회의 부분으로써 역할에 충실할수록 그대는 개체성과 즉흥성을 상실한다.
사회는 그대가 즉흥적으로 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게임의 룰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대는 사회에서 운용되는 룰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특정한 조직에 들어갔을 때, 그대는 룰에 따라 게임을 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조직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각의 바울은 개체성을 지닌 개인이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종교는 진리를 향한 개인적 접근방식인 것이다.
그대는 홀로 가야하고 그대만의 길을 가야 한다.
그대는 그대만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따라갈 수도 없으며 이미 잘 닦여진 길을 갈 수도 없다.
그대 고유의 길을 찾을수록 그대는 신,진리,또는 실체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
사실, 길은 걸으면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대는 걸음과 동시에 길을 만든다.
그것은 마치 숲속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길은 끊겼고 그대에겐 지도도 없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이리저리 살피면서 걷기 시작할 것이다.
바로 그대의 걸음에 의해서 길이 생겨난다.
삶은 거칠다. 삶이 야생의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삶에는 지도도 안내 표지판도 없다.
삶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삶을 알려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연코 없다.
삶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은 그토록 엄청나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모든 매력과 아름다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 삶은 경이로움을 상실한다.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놀랄만한 것이 없게 될 때, 그대의 눈은 흐려질 것이고, 심장은 고동을 멈출 것이다.
열정이 사라지고 사랑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경이와 놀라움,외경(畏敬),-이것이 그대를 이끄는 삶의 원동력이며 삶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경전과 형식화된 종교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잘 트인 뚫린 고속도로 위에 있지 않음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바울은 혁명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이 `혁명'이란 말을 매우 신중한 의미로 사용한다.
바울은 개혁적인 사람이 아니다.
개혁가는 사회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가? 이것이 개혁가의 관심사이다.
그는 사회에 촛점을 맞추고 사회를 지향한다.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그러나 혁명적인 사람은 세상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힘에 의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나는 누구인가?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가?
세상이 지금과 같은 방식을 따르기로 결정했다면 거기에 간섭하려 드는 나는 누구인가?
그는 세상을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는 세상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그의 혁명정신은 내면을 향한다.
그는 모든 에너지를 내면으로 돌린다.
혁명적인 사람은 포기할 줄 안다.
그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사회를 포기한다.
그는 자신이 적응할 수 있도록 사회가 변화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어리석은 욕망이다.
그런 욕망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유토피아는 존재한 적이 없다.
수 많은 개혁가들이 역사 속에 나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개혁가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삶을 낭비했을 뿐이다.
막스(Marx),레닌(Lenin),트로츠키(Trotsky)가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다시 왔다고 상상해 보라.
그들은 통곡할 것이다.
이런 세상을 위해 그들이 평생을 소모했단 말인가?
이것이 그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려고 애쓴 세상인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바쳤다.
그들은 자기들의 염원대로 세상을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불행한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개혁가들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혁명적인 사람은 말한다.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라. 아무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혁명가는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살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나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는 포기한다.
바울은 포기하는 자이다.
그들은 어떤 종교나 국가,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지이고 방랑자이며 히피이다.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도는 집시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혁명적인 사람은 말한다.
"나는 더 좋은 세상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나는 지금 이 순간에 산다."
그러나 개혁가는 미래를 희망한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나는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이에 대해 혁명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적당한 때는 바로 지금 여기이다. 나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이다."
혁명적인 사람은 현재에 산다.
한가지 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혁명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그는 모스크(Mosque)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하메드교인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사원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힌두교인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관심이 없다.그러니 나를 혼자 내버려 두라.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라.
그리고 나는 내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
내게 간섭하지 말라.
나도 당신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인 사람의 눈은 매우 실제적이다.
삶은 짦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뿐이다.
왜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는가?
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애쓰면서 삶을 탕진하는가?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이 순간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은 쾌락주의자이다.
그는 사랑하고 기뻐한다.
그는 이 순간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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