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니시의 마조 5

소처럼 걸으며 호랑이처럼 살펴라.


마조에게는 세 명의 걸출한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남전, 서당, 회해로 스승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즐겼다.
어느 날 그들은 마조를 따라 달맞이를 나갔다.
마조가 물었다.
"이런 때는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겠는가?"
서당이 먼저 말했다.
"공양에 좋은 시간입니다."
회해가 말했다.
"수행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남전은 아무 말 없이 휙하니 옷깃을 떨치며 물러갔다.
마조가 서당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경은 장에 들 것이다."
(마조는 지장의 이름을 갖고 농담을 하고 있다. 지장의 장은 바구니를 의미한다. 즉, 뭇다의 말을 담아 갖고 다닐 수 있는 바구니라는 뜻이다.)
그 다음 마조는 회해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은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마조는 두 번째 농담을 하고 있다. 회해의 해는 바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마조는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오직 남전만이 물외에 초연하구나."

한 승려가 마조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부처다."
"도란 무엇입니까?"
"무심이 도이다."
그러자 승려가 다시 물었다.
"부처와 도는 얼마만큼 떨어져 있습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부처는 펼친 손과 같고, 도는 주먹과 같다!"


라즈니시 강의

** 이 마조라는 이상한 사나이는 자신의 즉흥성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세상 어느 누구에도 관심이 없었다. 먼저 이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마조는 소처럼 걷고 눈빛은 호랑이같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즉흥성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세상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엄청난 용기가 없이는 네발로 걷지 못한다. 
그는 진리를 안다.
그것이 전부이다. 소처럼 걷는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그대는 선채로 잠잘 수 없다. 그것은 매우 힘들다. 잠을 자기 위해서는 대지와 수평을 이루어야한다. 

** 선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것은 동물들이 이난의 언어를 모두 이해한다는 거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 동물들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마음과 지성을 성장시키지 못하는가? 소에서 보듯이 그들이 그토록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그들이 대지와 수평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의 생물학적 조건이나 심리 상태 모두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중력에 방해받지 않는다. 인간은 두발로 섬에 의해서 균형체계 전체를 어지럽힌다. 그래서 머리가 발달한다. 두 발로 서는 것이 인간의 지성을 발달시키는 주요 원인이라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이 작은 머리 안에 있는 마음은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마조는 소처럼 네발로 걷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지금 마조가 무심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세상 안에 살면서도 마음을 버렸다. 그는 우주 전체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마음을 버리으로써 공을 이루었고 이 비어있는 가슴은 자동적으로 자비와 사랑, 겸손을 성장시킨다.
 겸손돠 단순성 만족도에 있어 소만한 동물은 없다.
그런데 마조는 소처럼 걷는 동시에 호랑이처럼 사방을 둘러 본다.
이것이 선의 모순이다. 그대는 소처럼 겸손해야한다. 동시에 호랑이처럼 혁명적이고 모험적이어야 한다.  그는 한 순간에 그대를 덮쳐 끝장낼지도 모른다. 이것이 단순한 상징인지 사실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 마조는 늙었다. 그는 낡은 세상의 한 부분이다. 그는 서당, 회해, 남전이라는 세명의 걸출한 제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 남전은 스승의 가슴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마조의 의발을 전수받은 사람은 회해이다.

마조는 지장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을한다. 그대는 부처님의 경을 전수하는 각자가 될 것이다. 그대는 부처님의 경을 담을 바구니다.
마조는 회해에게는 선이 전수될 것임을 말한다. -선은 바다로 갈 것이다.

오직 마조만이 물외에 초연하구나....
남전은 스승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훌쩍 자리를 떠났다. 그의 행동은 경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옳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불성을 닦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대는 불성을 익힐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다.
나는 경전과 불성에 대해 관심이 엇다. 나는 떠날 것이다. 나는 붓다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불성을 닦거나 위대한 학자가 되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선의 역사에서 남전은 특별하다. 그는 뛰어난 이해력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마조는 남전을 사랑했다. 그러나 마조는 회해를 후계자로 선택한다.  법을 잇는다는 것은 전승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현상이다. 회해가 진리에 더 가까운 사람으로 판단했던 까닭일 것이다.

** 한 승려가 물었다. 부처런 무엇입니까
마음이 부처다.
도란 무엇입니까 무심이 도다.

마음이 비는 것- 그것이 무심이다. 무심은 다른 것이 아니다. 무심은 마음과 똑 같다. 다만 차이점은 사념으로 가득차 있느냐 텅 비었느냐의 차이다. 비어 있는 마음이 무심이다. 마조는 점진적인 방법을 택하여 말하고 있다.

부처와 도는 얼마쯤 떨어져 있습니까?

차이점은 없다.  펼친 손도 내 손이고 주먹을 쥔 손도 내 손이다. 다만 모양새가 다를 뿐이다. 부처와 도가 거의 같다는 말은 아름다운 말이다. 길을 여행하면서 그대는 서서히 부처가 된다. 그것은 마치 조각을 하는 것과 같다. 

** 펼친 손과 주먹은 같다. 둘다 그대의 손이다. 부처와 도의 차이점은 없다. 

** 이뀨선사의 시

심술궂은 사내 하나가 있었으니
그는 석가라고 불려졌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수께끼에 빠졌던고!

2500년동안 석가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고담 붓다에 비해볼 때 모든 현재의 고대의 모든 종교 선생들은 피라미에 불과하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추종자가 되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그대가 특정한 계율을 수행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그대의 도덕성과 삶의 스타일을 조작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대를 주물러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하여왔다. 
붓다만이 완전한 자유안에 홀로 서 있다.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그의 궁극적인 신비를 알 수 없다. 사슬에 묶인 인간이 어떻게 하늘로 날아 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모든 종교는 인간을 사슬로 묶는다. 

** 붓다는 어떤 종교도 교육도 행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그대 자신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대 자신이 되는 것, 이것이 그대의 종교이다. 고탐붓다만큼 자유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인류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붓다는 추종자조차 받아주지 않앗다. 그것은 그대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받아들인 유일한 사람은 같이 여행할 동료들이었다.(11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