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니시의 마조 4

좌선 중에 침을 뱉은 까닭은

어느 날 백장이 마조를 시봉하여 산보를 나갔다. 그때 돌연, 머리 위로 들오리 떼가 날아 올랐다. 마조가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백장이 말했다.
"들오리 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그냥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조가 느닷없이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백장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조가 말했다.
"날아가 버렸다고? 그들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
그 순간 백장이 문득 깨달았다.

이튿날 마조가 법당에 올라 법좌에 앉았다. 이윽고 대중이 다 모이자 백장이 돌연 몸을 일으켜 자리를 걷어 버렸다. 그러자 마조는 곧 방장으로 돌아갔다. 백장이 그를 따라 들어갔다.
마조가 물었다.
"아까 내가 미처 설법을 시작하기도 전에 왜 자리를 걷어 버렸는가?"
백장이 말했다.
"어제는 스님께 코를 비틀려서 아파 혼났습니다."
"어제 너는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가?"
"오늘은 이제 코가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어제의 일을 잘 알고 있구나."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좌선 의자에 올라 앉은 마조는 그날도 어김없이 '퉤'하고 침을 뱉었다.
시자가 물었다.
"왜 침을 뱉으십니까?"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모두 내 눈 안에 들오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볼 만한 구경거리를 왜 싫어하십나까?"
"너에겐 그럴지 모르지만 나는 싫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보살의 경계이다." 

 


라즈니시 강의

** 이 이야기는 선에 전해오는 수많은 일화 중의 일부이다. 그 일화들은 행동을 통해 깨달음을 보여준다. 스승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 때 제자는 즉각 응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응답은 생각ㅇ르 통해 나온 것이 아니라 가슴의 빈 공간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선은 궁극적인 방편이다. 그대를 각성시키기 위해 스승들은 수많은 방편들을 개발한다. 이 禪話는 단순한 수수께끼가 아니다. 선화는 스승과 제자의 교류이다.  

** 보통의 논리적인 사상가에게는 이 선화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명상과 조화를 이룬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엄청난 각성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마조는 오리가 날아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오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도 안다. 그는 지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조의 질문은 객관적인 대상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백장은 표적을 놓친다. 그의 응답은 생각을 통해 나온 것이었다.
"들오리 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답한다. 그것은 가슴의 빈 공간에서 나온 응답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온 응답이다.
"어디로 갔는가?"
스승은 다시 기회를 준다.

그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항상 여기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는 광대하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항상 여기에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마조가 백장에게 기대했던 대답이다.

** 마조는 백장의 코를 잡아비틀었다. 그것은 백장이 마음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마음은 오직 고통만 가져온다. 마음은 곧 고통이다(81p)
마조는 백장의 코를 비틀었다. 그러자 백장은 아픔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 마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질문에 피상적으로 대답하지 말라. 표면에 보이는 대로 보지 말라"
백장은 비명을 질렀다.
이 비명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전체를 통해 나온 즉흥적인 반응이다. 바로 그 순간 스승은 핵심을 말할 수 있다. 이제 백장은 올바른 공간에 위치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마음 안에 있지 않다. 고통으로 인해 그의 존재 전체가 깨어났다.
의식의 각성에 고통은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잠들어 있는 제자를 깨우는 수단으로 많은 스승들이 고통을 이용했다. 
그런데 세상의 낡은 종교는 그대를 위로해서 편안히 잠들게 한다.
"신이 보살피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
그러나 선은 그대를 위로하는데 관심이 없다. 선의 관심은 그대를 깨우는 것이다.

** 백장이 비명ㅇ르 질렀지만 마조는 동정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는 왜 코를 비틀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날아가 버렸다고? 그들은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
그 순간에는 고통이 있었을 뿐 생각이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이 텅 비었다. 마조는 아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 심장한 한마디를 던진다. 
<여기>는 광막하기 이럴데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에 있던지 그들은 항상 <여기>에 존재할 뿐이다.
이제 백장은 스승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갔다. 
들오리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 것도 딴 데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발편이었다.
그 순간 백장이 문득 깨달았다.
<지금, 여기>의 영우너성과 광막함을 보면서 백장은 문득 가슴속의 빈 공간을 느꼈다. 그는 진리를 깨달았다.

** 마조는 아무 제자의 코나 비틀지는 않는다. 백장은 준비가 된 것이다. 그는 경계선에 온 것이다. 누가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다. - 여기가 유일한 공간이며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다. 

** 왜 침을 뱉으십니까?"
... "보살의 경계이다."

이것은 앞의 이야기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마조가 좌선의자에서 침을 밷은 것은 진짜로 산하대지가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제자가 무분별의 침묵을 유지하는지 아니면 분별에 휩쓸리는지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선의 모든 태도는 무분별이다. 분별하지 말라. 적에도 제자는 스승의 행동을 판단하지 말아야한다. 시자는 주시자로 남아 있어야한다.  마조는 시자를 자극하고 있다. 그는 제자의 분별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시자는 분별하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미 잊었다.
만일 거울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 거울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좋지 않은 짓입니다"하고 말하겠는가? 제자는 과녁을 놓쳤다. 익서은 깨달음을 얻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마조가 말했다.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좌선의자 앞에는 산하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명상을 아는 제자라면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질문이 아니라 반응이다. 
마조는 제자가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스승님의 무분별심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입니까?
그러나 제자는 마음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문제를 토론하려한다. 그러나 선은 토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은 논쟁이 아니다.
마조는 자신의 방편이 실패했음을 알고 말문을 닫는다.

** 다이구 료오깐의 시

절벽은 높고 깊은데 물살이 달려와 부딪친다.
완벽한 교류의 영역은 곳곳마다 새롭다.
그곳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지 못하니
그들이 언제나 幻影의 포구에서 벗어날까?


** 존재계의 매 순간은 교류를 위한 순간이다. 그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은 없다. 매순간이 특별하다. 매 순간이 그대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아름다운 일출, 고운 석양, 별이 빛나는 밤하늘, 그저 침묵의 지금. 자신을 주시자로 기억하기만 한다면 어느 것에도 빈 거울로 남아 있다면 어느 순간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 빈 거울 앞에 환상은 오래 머물 수 없다. 모든 환상은 사라진다. 환상은 오직 그대가 거기에 휩쓸릴 때에만 유지된다.

선사는 큰 자비심을 갖고 묻는다.
-그들이 언제나 환영의 포구에서 벗어날까?-
 깨달음을 위한 시간은 매순간 온다. 매 순간이 꽃피기 적당한 계절이며 적당한 기후이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놓친다.
습관처럼 놓친다. 그 습관을 버려야한다. 존재의 중심에 머물러야한다. 
선악과 미추를 판단하는 말한마디 없이 오직 주시하면서.
아무 말도 필요 없다. 주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모든 환상이 사라진다.


**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 일 때 이미 모든 사람(everybody)이다.(9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