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가터 (합천 삼가면 외토리 1501-1505, 1526-1529, 1548-1561)
스승은 합천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나셨다.
본가는 삼가 판현(외토리에서 합천쪽 약 5km)에 있었다 하며 토동은 인천이씨 외가다.
삼가는 산청군 상비량면에 접하며
그 중에서도 외토리는 바로 접한 마을이 합천에서 서남 25km 지점이며 진주까지도 25km. 산천
재 덕산 까지는 30km지점이다.
당시에는 닥산도 진주목사의 관할이었으며 삼가 토동에서도 가장 가까운 도회지는 진주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스승의 뇌룡정은 복원되어 있고 생가터는 토지 매입이 계획 중이다.
스승은 1526년 부친이 별세하자 이곳으로 와 삼년 상을 치렀으며
다시 1548년부터는 김해를 떠나 이곳으로 와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강학을 시작하여 1561년 덕산으로 가시기 전까지 살았다.
유명한 을묘사직소(단성소)도 이곳에 있을때인 1555년에 쓴 것이다.(명종 10년)
1576년 삼가의 유림들이 화산서원을 세웠고 광해조에 사액(용암서원)을 받았으며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을 새긴 묘정비를 세웠다.
현재 서원터는 수몰되고 비석은 대방면 고개마루에 옮겨져 있다.
서원은 복원을 추진 중이다.
생가터 가는 길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삼가 토동을 찾아보고 500년전의 시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은 현세적
편해 빠진 삶의 또한 도로의 편린일지도 모르겠다. 남명 탄신 500주년을 기념한다고 한 편
에서는 남명 기념관이 지어지고 국제 학술회의가 준비 중이며 금년도 국가, 지방자치 단체
의 지원금만도 줄잡아 20억, 전체 예산 100억이 넘는 돈을 쏟아 붓는다는데.
남명생가터 가는 길은 표지판 하나 없고 집터는 열댓평 남아 집 뜯은 구둘짝으로 축대가
쌓이고 낡은 비닐 조각만 훝날릴 뿐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철판 표지판은 대밭 뒤 한쪽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스승께서 태어나신 곳 아닌가. 이 마을 토동은 6.25이후 우리 농촌이 살았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신기한 마을이란 생각이 든다. 난간 없는 축대 골목, 탱자나무
울타리, 흙벽 바른 목조집, 여물쌂는 가마솥과 시커먼 부억. 뒷담쪽에서 누나가 저녁밥을
지으려고 나무단을 들고 부억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나타날 것 같은 눈시울이 찡했다.
토동으로 가자면 20번 국도 산청군 생비량면과 합천군 삼가면 의령군 대의면이 나뉘는 지점
에서 바싹 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경계지점에서는 이미 북쪽으로 논의 끝자락 개천과
면하는 곳에 뇌룡정이 보이나 차가 삼가면에 들어서면 이미 들어가는 입구가 없다. 다시 되
돌아 나와야 한다. 그러니까 차를 손수 운전할 경우 대의면 쪽으로 꺽어 가던 길 20번 국도
아래의 굴다리를 통과하여 들어가야만 외토리에 들어 갈 수 있다. 마을 입구에 이르면 큰 제
각과 개천가 큰 정각이 보이는데 이 들은 다 남명의 유적이 아니다. 개천가로 보이는 작은
열칸집이 뇌룡정이며 뒤의 큰 집은 용호정. 용호정 앞에 세워진 큰 돌은 이 들판의 이름이
강궤평(降櫃坪)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입구 꺽어지는 길에 간판이 비스듬이 기울어져 손님을 맞는다. 계부당은 뇌룡정 맞은 편에
있었다고 하나 복원된지 않았다.
생가터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민가 두어채 뒤에 있는데(차가 접근하지 못함) 마을 앞에
돌에 새긴 입구표시가 있으나 방향표시는 없다. 생가터는 다른 인가로 둘러싸여 15평 정도의
밭뙈기로 남아 있다. 현재 500주년 기념사업으로 1300여평을 매입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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