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남명 유적지 탐방 - 박종숙
"따르르릉, 따르르릉……."
"아이구, 큰 일 날뻔 했네.'
5시 13분에 울리는 벨소리에 얼른 일어나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하루에 많은 곳을 보아야 하는 관계로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혹시라도 늦게 일어나게 될까봐
지난 수요일 car pool하는 김선생님께 반 농담조로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침에 깨는 즉시 morning call 해주세요."
토요일 밤 보통 때보다 일찍 자려고 하였지만,
일요일에 해야할 일을 당겨해 놓아야 했기에 그러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것입니다.
전화벨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큰 일 날 뻔 하였습니다.
서둘러 준비하고 집을 나서서, 까만 새벽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선생님을 모시고 학교에 도착하니 겨우 6시 8분전이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지난 93년도이지요.
영남대의 유홍준교수가 지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가
우리들에게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워준 일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하여 2권·3권에서 자신 있는 안목과 재미있는 논조로
'우리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다.'라는 인식을 높여주고
우리 문화에 대한 흥미를 국민적으로 고양시켜 주어
'○○ 역사 답사회','○○ 탐방기'가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이러한 분야에 관심은 많았으나, 이곳 저곳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너무나도 학교 일이 많았기에,
남이 다녀서 보고 느낀 것을 읽고
그 즐거움을 마음으로 그려보고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본 연수회에서 마침 이교수님의 배려로
저도 탐방을 떠나게 되어 참 기뻤습니다.
몇 년 동안 가지고 있던 소망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저의 첫 탐방지가 훼절하지 않은 南冥 曺植선생의
정신 세계와 학문이 익어간 곳을 가게 되니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연수회에서 귀염둥이 그룹에 속하기 때문에
일찍 가서 출발하는 것을 도우려고 했지만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무 도움이 못 되었으나,
정선생님께서 척척 일을 알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들 대신에 불편한 자리에나 앉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뒷 바퀴가 있는 자리에 앉아 06:13분에 서부 경남으로 향하였습니다.
조금 달리다 보니 한가지 불편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바로 오른쪽 눈 옆에 무엇이 어른어른하는 것이었습니다.
두껍게 차창문의 테두리가 몇 개 걸쳐 있어서 밖의 풍경도 볼 수 없고
여간 눈이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 앞자리는 옆이 시원하게 창문만으로 되어 있어서
바깥 풍경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래서 유교수님께서 고속버스 25번 아니면 33번 좌석을 탄다고 하였구나.'
하면서 제 자리는 몇 번이나 될까 하며
버스가 달리는 동안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보았습니다.
새 차에다 눈까지 아프고 하여 속이 몹시 불편하였습니다.
참다참다 못해 맨 뒷자리의 한 가운데로 잠시 나와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07:15분에 '태화휴게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얼른 내려 숨을 크게 쉬고 촉촉히 젖어 있는 논을 바라보며
아침 운동삼아 팔짝팔짝 뛰기도 하였습니다.
'忘憂堂 郭再佑 紅衣將軍'과 관련이 있는
'鼎岩'과 '鼎岩津', '忠翼祠'와 '縣鼓樹'는
차 안에서 경성 대학의 정교수님의 상세한 설명으로 듣고 보면서 계속 달렸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인솔하여 갈 때 외는
부산을 별로 떠나본 적이 없어서 지나가는 곳의 지명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곳의 땅이름을 잘 쓸 수가 없습니다.)
정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계속 바깥 풍경을 살폈습니다.
우리 나라의 보통의 시골 마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집 가까이에 있는 낮은 동산마다 雙으로 된 무덤이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담이 없는 집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집 가까이에 부모님의 무덤을 마련해 놓아야 3년 동안 시묘를 잘 할 수 있었겠고,
죽은 후라도 항상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 같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매장 문화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란이 많지만 땅만 넓다면 집 가까이에 부모님을 항상 모시고
자기 자손들과 더불어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삶의 질 향상의 목표 아래
농촌에서 초가나 기왓집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부드러운 산등성이의 곡선에 어울리는 초가 지붕은
이제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고 실물은 민속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요즘의 농촌집들을 보니 비록 집의 外形은 반듯반듯한 벽돌로 지었지만,
담이 없는 널찍한 마당을 보니 아직도 넉넉한 인심을 볼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웃을 믿고 자신 자신을 다 드러내 보이고
서로서로 맡고 맡기는 저 인정이 아직도 살아있구나.'
하는 가운데 08:15에 南冥 曺植선생의 학문이 익어간 '雷龍亭'에 도착하였습니다.
'雷龍亭'은 南冥선생이 48세에서 60세까지 계시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입니다.
아담하고도 정결하였습니다.
정교수님의 깊은 안목으로 펼쳐주시는 설명을 들으니,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가 南冥 曺植선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後學들이 여기를 찾아와 보면 설사 이 곳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더라도,
천인절벽을 배우고 간다."
는 말씀에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性齋 許傳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인
'麗澤堂'에서 영정과 문집판을 먼저 참배하고 나와,
버스 가까이에서 논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지난 태풍 '예니' 때문에 쓰러져 있는 벼를 보니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엄하고도 맑은 산 아래에서 누워 있는 벼를 보며
'어서어서 일어나거라.'하며 念頌을 가만가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길 위에 있는 수많은 나락 알갱이를 보니
이게 바로 '佛刹 微塵數'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斷俗寺址로 가는 버스에서 꾸지람을 들었지요.
"탐방을 가면 강아지를 보고 오지 말고, 사람을 보고 오십시오."
이 말이 백 번 옳은데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우리들로서는
사람을 청하고 묻고 하는 것이 죄송하기 때문에 궁금함이 있어도 그러지를 못합니다.
斷俗寺址에는 매화나무(政堂梅)가 유명하고 당간 지주가 볼 만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의 절 규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유교수님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2권에서
단속사지에 있는 몇 채의 집을 헐어 다시 절터로 해야한다고 하였지만,
제가 본 견해로는 그 집에 사는 것도 恩德인 것 같았습니다.
이왕 절이 허물어졌을 바에야 그 평평한 터에 사람들이
다정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다 佛恩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당장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함안에서 이주해 와서 4대째 그 정당매를 지켜가는
강할아버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몸도 불편하고 허름한 할아버지 입에서 술술 한자 성어가 나오는 것이
저기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그 무엇이 있구나, 살아있는 가르침
이 바로 저기에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三 憂堂 文益漸선생의 면화 시배지와 그 분을 기리는 道川書院으로 가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들려주시는 정교수님의 설명으로
유학의 세계와 스승의 학풍을 이어가는 학문의 자세,
역사 너머에 얽혀 있는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살아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南冥 曺植선생께서 61세부터 72세까지 만년에
자신의 학문과 '敬'과 '義' 사상으로 조선 선비들에게 최고의 가르침을 폈던
山川齋와 그를 기리는 '德川書院'을 참배하였습니다.
고아한 德川書院의 강당에 편히 앉아
옛 선비들의 文을 향한 경건한 자세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영의정 10명이 대제학 1명에 당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서원 원장 1명에 당하지 못한다."
이 말 속에 우리 祖上들이 추구해온 學門에 대한 自負心, 堂堂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또,
'지금 시대를 잘 만나 이 곳 강당에 당당히 앉아있을 수가 있구나.
옛날 같으면 근처도 오지 못했을 것인데.'
하는 생각으로 슬며시 웃어보기도 하였습니다.
山川齋의 주련에 있는 글귀(只愛天王近帝居)처럼
지리산 천왕봉을 가까이 느끼고 싶어 같이 간 선생님들께 여쭈어 보았으나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둘러서 있는 산세가 예사롭지가 않고, 그 모든 것이 맑았습니다.
그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자연과 함께 숨쉬고 자랄 수 있는 그 곳 아이들을 보며,
도시의 작은 그릇 안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의 情緖와 浩然之氣를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이 참으로 걱정되었습니다.
가야국의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仇衡王의 陵을 본 후,
유명한 안의 지방의 곰탕으로 허기를 해결하였습니다.
본디 이름난 구수한 곰탕인데다,
'飢者甘食'의 원리로 모두들 한 그릇을 훌쩍 비웠습니다.
배불리 먹은 후의 포만감과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고단함이 겹쳐 잠이 왔지만
마지막을 향해 일어섰습니다.
燕巖 朴趾源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안의 초등학교를 거쳐 一
鄭汝昌선생의 고택을 찾았습니다.
버스에서 보이는 길가에는 고풍스러운 집들이 많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꽤나 정다웠습니다.
개평 마을에 있는 一 선생의 고택의 정면에 결려있는 정려문을 보며
저런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하는 심정이 들었습니다.
불과 1세기도 되지 않은 동안에
수백년동안 지켜오는 많은 德目들이 깡그리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스스로 '文化 民族'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자책과 함께
둘러보는 늠름한 고택이 홀로 의로운 것 같기도 하고, 슬퍼게도 보였습니다.
10월 중순의 어둠이 스미는 시간, 마지막 기대를 안고 靑溪書院을 지나,
濫溪書院을 참배하였습니다.
관리인이 온다기에 '또 사람을 볼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麗澤堂'에서 만났던 할아버지만큼의 해박함과 감탄을 기대하여서인지
이번에는 와 주신 고마움외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참 세상은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는 소득이 있고,
기대한 곳에서는 소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不增不減'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서원을 나서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두컴컴한 서원밖의 공터에 조그만 꼬마 아이가 땅바닥에 탁 붙어 서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작았습니다.
그래도 다리를 반쯤 내어놓고 다부지게 걸어갔습니다.
옆에서 벼를 거두던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15개월 된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自然 그대로에서 自然 그대로 반짝반짝 자라고 있는 아기를 신기해 하며,
하루의 탐방을 마치고 버스에 오르니 18:18분이었습니다.
뒤에 내려오시는 분들을 기다렸다가 부산으로 향하였습니다.
집에 와서 밤이 깊었지만 이 감동과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또 오늘 자란 저의 안목을 확인해 보려고
지난 몇 년간 저를 즐겁게 해 주었던 유교수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2』를 들고
南冥 曺植선생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랬더니 오늘의 배움과 책에서의 가르침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미학과 정신의 차이였습니다.
南冥선생만큼이나 꼿꼿하신 두 분 교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우리 유학자들이 지녔었던 진정한 道와 氣象을 새기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 아득한 전설이나 克己의 表象으로나 여겼던
우리 儒學者의 哲學 세계가 좀 더 맥을 가다듬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오늘 探訪의 魂이 저의 정신 어딘가에 저장되어
'밖으로는 敬을, 안으로는 義를'
실천하는 힘이 되리라는 다짐과 함께
웅혼한 "請看千石鐘 非大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을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