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은 소설 토지와 연속극 토지에서 나온 평사리가 있는 곳이다.
평사리는 서측 언덕에서 동쪽으로 뻗은 마을이고 이곳에서 하동쪽의 언덕 입구에 악양루가 있다.
옛날에는 섬진강 강언덕가에 있었을 터이지만 도로를 내면서 악양루는 산쪽으로 비껴났다.
그래도 내려다 보는 수려한 섬진강의 경관은 매우 아름답다.
다만 국도변 너무나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어 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다.
인근 마을의 노인들조차 이곳을 찾지 않음이 분명하다.
스승께서 이곳을 지난 것은 1558년 4월16일이며 이 때 지리산 유람을 기록한 유두류록에 의하면
그 행장이 대단 하였던 것 같다. 스승은 악양루에 시 한 수를 남겼다.
악양정-추록
1990년 9월 20일 대한민국 보물 제1046호로 지정된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의 산수화
는 인조 21년(1643) 선조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1588∼1644)의 의뢰에 의하여 화
가 이 징(國工, 虛舟 李澄:1581∼?)이 그렸고, 하단의 글씨는 신익성의 자필이다.
세로 89㎝ 가로 56㎝인 이 그림에는 일두 정여창(一 鄭汝昌:1450∼1504) 선생의 섬진강시 절
구(蟾津江詩:先生絶句)와 악양정시서(岳陽亭詩敍)·신익성의 발문, 그리고 아래와 같은 남명(南
冥曹植:1501∼1572) 선생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남명 조선생의 「유두류산록」에 이르기를, 도탄(淘灘)에서 1리쯤 가면 정여창 선생이 살던
곳이 있다. 선생은 천령(天嶺:咸陽)의 유종(儒宗)이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의 도를 이었
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나중에 내한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나아갔다가 교동주(연산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말은 남명선생이 명종 13년 1558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의 4월 16일 기록에
있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한 도탄(淘灘)에서 1리쯤 되는 지점은 정여창 선생이 함양으로부터 처
자를 이끌고 와서 살던 곳이라는 뜻이다.
정여창 선생은 연산군 4년(1498)에 있은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 畢齋 金宗直:1431∼1492)
의 문인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가 6년 후인 연산군 10년(1504) 4월 1일 적소
(謫所)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해 9월에 다시 일어난 갑자사화 때 부관(剖棺)의 율을 당한 분이다.
경남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분이기도 하다.
호는 일두(一 ),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일두 정선생 행장에 의하면, 그는 섬진(蟾津)의 어귀에 "작은 정자를 얽어 악양정(岳陽亭)이라
편액하고, 몸을 감추어 닦으면서 글을 읽고 도의를 강론하며 시가를 읊으면서 즐기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함양군 개평 출신이지만, 그의 행장과 연보, 그리고 관련 사료 등을 종합해 보면, 성종 14
년(1483) 진사시에 합격할 때에도 이곳에 살았고, 21년(1490)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에도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면 일두 정여창 선생이 살았던 지점은 지금의 어느 곳일까. 그리고 악양정은 어느 곳에 있었
을까.
무오사화 이후 4백 년이 지난 고종 33년(1896) 산석 김현옥(山石金顯玉:1844∼1910)은 몇몇 동지
와 더불어 소학강계(小學講契)를 베풀고, 하동부사 장두삼(張斗參)에게 청하여 남명선생이 언급한
도탄에서 1리쯤 되는 지점에 악양정을 복원코자 협의하였다.
이에 앞서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1470∼1550)은 선생이 몰한 지 45년이 되는 명종 4년(1549)
쌍계사에 가서 팔영루 운(八詠樓 韻)을 짓고 일두선생의 옛 집에 들러 "죽림으로 반이 가렸다"는
시를 남겼고, 옥계 노 진(玉溪 盧色:1518∼1578)은 선조 4년(1571) 10월 쌍계사를 구경하고 일두
선생의 유적을 살펴 "석양에 말을 세워 옛 터를 찾으니"라는 시를 남겼지만, 그러나 그곳이 어디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러했던 것이 "도탄에서 1리쯤"이라는 남명선생의 언급에 의하여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덕은동(德隱洞)으로 밝혀진 것이다. 4백 년의 세월 속에 악양정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었지만, 전설
상의 위치와 뜰 앞에 심었다는 매죽(梅竹)이 확인됨으로써 입증된 것이다.
남명선생이 언급한 도탄은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하며, 덕은(德隱)이라는 말은
일두 정선생의 유덕이 갈무리되어 있다고 하여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고증된 후 광무 5년(1901) 4월에 악양정을 중건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1833∼1906) 선생이 「악양정중건기」를 찬하였고,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한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1853∼1936)는 악양정이라는 현판과 주련의 섬진
강 시를 썼다.
악양정 경내의 덕은사(德隱祠)에는
태사 휘국공 회암 주부자(太師徽國公晦菴朱夫子)·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寒暄堂金宏弼)·
문헌공 일두 정여창(文獻公一 鄭汝昌)·
문민공 탁영 김일손(文愍公濯纓金馹孫)·
둔재 정여해(遯齋鄭汝諧) 등 다섯 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석채의전을 받
들고 있다.
그리고 악양정은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명과 정여창
남명은 정여창을 학문의 선배로 여겼으며 그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유학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로서 실천주의적 유학의 전통이 남명에 계승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정여창은 함양에서 태어 났으며 집안은 대대로 함양에서 살았다. 여듧살에 아버지
의 벼슬에 따라 의주에 살았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이 여창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고 전한다. 그의 아버지는 정3품 함경도 우후에까지 올랐으나 이시애의 난에 목숨
을 잃었다. 정여창은 김종직에게 배우고 김굉필, 김일손 남효온과는 도의지교로 사
귀는 사이였다. 하동 악양 덕은마을에 정여창의 정자 악양루가 있으며 정여창은
벼슬에 나가기 전과 은퇴 후 이 마을에 사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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