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난설헌 허초희 가족사항


   아버지 초당 허엽 (1517-1580) 

        본관 양천(陽川). 자 태휘(太輝). 호 초당(草堂).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51년 부교리가 되고, 

        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장령(掌令)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면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으로 재기용되고 다음해 대사성으로, 1562년 지제교(知製敎)를 겸임, 박  
               계현(朴啓賢)과 함께 명종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그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나가 조광조(趙光祖)   
               윤근수(尹根壽)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허자(許磁) ·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
               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과격한 언사 때
               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에 올라 향약(鄕約)의 시행
               을 건의하였다. 

        1575년 동인 ·서인의 당쟁이 시작될 때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 중추부동지사가 되
               어 상주(尙州) 객관(客館)에서 죽었다. 

        30년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장남 성(筬)과 차남 
               봉(載), 삼남 균(筠), 딸 난설헌(蘭雪軒)과 함께 중국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해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
               (三綱二倫行實)》 편찬에 참여하였다.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고,
               저서에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큰오빠 악록 허성(1548-1612)과 두 언니는 이복 어머니 소생이다.

        미암 유희춘에게 글을 배우고 대사성 대사헌 이조,예조,병조판서를 지냈다.
        자 공언(功彦). 호 악록(岳麓) ·산전(山前).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 

        1590년 전적(典籍)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  
                一)과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황윤길은 침략의도를 지적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
                우려가 없다고 하자, 김성일과 같은 동인(東人)인데도 그 의견에 반대하여 침략  
                가능성이 있음을 직고하였다. 정언 ·헌납을 지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강원도 소모어사(召募御史)를 자청하여 군병
               모집에 진력하였다. 뒤에 응교(應敎) ·사인(舍人)을 지내다.

        1594년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대사간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예조판서 ·병조판서
               를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동생 봉(載) ·균(筠) 및 여동생 난설헌(蘭雪
               軒) 등과 함께 당시 이름난 문장가이며, 성리학에도 통달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
               다. 저서로 《악록집(岳麓集)》이 있고, 글씨에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龍仁) 
               가 있다. 



   큰언니 우성전(1542-1593)에게 시집감-퇴계에게 배우고 대사성에 이름

          남인의 거두이며 1591년 남인 정철이 물러날 때 북인들에 의해 삭직되었다. 임란때는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과 함께 전공을 세웠다. 의병장으로서 계속 활약하여 퇴각하는 
          왜군을 의령가지 추격하였다.
          저서에 역설, 이기설 계갑일록 등이 있다. 


   작은언니 박순원에게 시집갔다.
 

   작은오빠 하곡 허봉(1551-1588)

          자 미숙(美叔). 호 하곡(荷谷). 유희춘(柳希春)의 문인.

          1563년 동생 초희가 태어날 때 16세였다. 글에 뛰어나 초희의 오빠겸 스승이었다.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574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이듬해 이조좌
                 랑(吏曹佐郞)으로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의 선봉이 되어 심의겸(沈義謙) 등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1577년 교리(校理)가 되고, 

          1583년 전한(典翰)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내고, 그해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
                 였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주선으로 재기용되나 거절하고, 백운산(白雲山) ·인
                 천 ·춘천 등으로 유랑하다

          1588년 금강산에 들어가 병사하였다. 

          문집에 《하곡집》 《하곡수어(荷谷粹語)》 등이 있고, 편저에 《의례산주(儀禮刪註)》 
                 《북변기사(北邊記事)》 《독역관견(讀易管見)》 《이산잡술(伊山雜述)》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이 있다. 



   동생 허균(1569-1618)

          허초희 보다 여섯 살 아래이며 늦동이로 태어나 귀여움을 받고 자랐으나 열한살의 나
          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조숙하였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누이를 극진히 사랑했고 누
          이를 아껴 누이가 시를 쓰면 이를 거의 외우다 시피 했다. 누이가 명을 달리했을 때 
          겨우 이십세이었다.
          유성룡에게 문장을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유교, 도교, 불교을 익혔고 중국에가서 천주교에 입문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허균이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도 였을 지도 모른다.
          호는 교산 성소 혹은 백월거사 자는 단보라 썼다. 정치적으로는 불운했다.

          1589년 21세에 생원이 되었고 1594년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내며 광해왕을 가르쳤다.

          1590년 난설헌집을 필사본으로 만들고 1608년 목판본으로 찍어내다.       

          1610년 명나라에 가 천주교를 배우고 문장을 날렸다.

          1613년 계축옥사에 연관하여 위기에 처하자 이이첨과 협력하였고 

          1617년 좌참찬으로 승진 

          1618년 광해왕의 폭정에 항거하는 거사를 일으키려 하다가 참형됨 



   김성립(1562-1592) 

          허초희와 1577년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대대로 벼슬한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으 
          나 허초희가 죽을 때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으며 임란때 죽었다.
          시조부 김홍도는 진사 문과에 장원한 재원
          시부 김첨도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에 드나들었다.



   손곡 이달
 
         당대의 대 문인으로 시문에 능하였다고 하나 서출 출신(기첩이었다함)으로 벼슬에 나
         가지 못했다.
         성격이 활달했으나 세 속의 예절에 얽매이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허엽 일가와는 마음이 통하여 난설헌과 허균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