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있어 지리산은
흠모의 대상이자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닮고자했던 이상의 세계였다.
지리산의 기백과 기상이 자신이 꿈꿔왔던 유교적 이상사회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명은 말년(61세)에는 모든 재산과 장자권리까지 동생 ‘환(桓)’에게 물려주고
아예 지리산 밑 동네인 사륜동으로 이사를 와 지리산의 품에 파묻혀 살게 된다.
합천 뇌룡정 시대인 58세(1558·명종)때 남명은 친구들과 함께 16일간 지리산을 여행하며
“유두류록(遊頭流錄·두류산을 둘러본 기록)”이라는 일종의 여행기를 남겼다.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에 은거했던 수많은 학자들을 추모하면서 이상향인 청학
동을 찾아가는 긴 여정을 밀도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유두류록에 의하면 남명이 제자 김우옹(金愚翁)과 함께 뇌룡정을 떠난 것은
그해 1558년 음력 4월 10일.
남명은 자형인 이공량(李公亮)과 친구인 고령현감 이희안(李希顔), 청주목사 이정(李楨),
김 및 제자 악사 등 40여명과 함께 15일 지금의 사천시 축동면 구호마을 포구에서 목선을
타고 출항한다.
유람단의 여정은 사천만→섬진강→악양→쌍계사→불일암→신응사 코스였다.
남해바다에서 섬진강 하구쪽으로 방향을 잡은 배는 16일 새벽 악양현(岳陽縣) ‘삼암(지
금의 악양면 부춘리)’ 부근을 지나게 되는데 선생은 이곳에서 고려조 유학자인 ‘한유한
(韓惟漢 ?~?)’을 떠올린다.
한유한은 당시 서울인 송도에서 살다 최충헌(崔忠獻)의 무신정권이 전횡을 일삼자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내려와 숨어 지냈다.
남명은 그의 깨끗한 절개를 추모하고 술을 따른다.
악양 부근 섬진강 강가에는 누군가가 “모한대(慕韓臺)”라고 새겨놓은 거대한 바위가 있
다. 모한대를 ‘한유한을 그리워하는 장소’라고 풀이하는 학자들은 이 곳을 삼암으로 추
정한다.
배가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부근을 지나가자 남명은 인근에 살았던 일두 정여창
(鄭汝昌·1450~1504)을 다시 추모하며 “명철(明哲·현명한 학자)의 행·불행이 어찌 운명
이 아니겠는가?”라고 당대 최고 유학자의 비운을 안타까워했다.
당대 성리학의 비조로 꼽히는 정여창은 연산군(1498년)시절 무오사화로 유배됐다가 숨졌으
며(1504년), 이후 갑자사화때는 사체까지 훼손당하는 ‘부관참시’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후에 문묘에 배향되는 동방 18현의 1인이되며
경남에서는 유일한 1명의 배향인물이다.
이곳 악양루에는 남명의 시가 걸려 있으며 인근에 정여창의 사당이 있다.
‘도탄(현재 화개장터 부근으로 추정)’에서 배를 내린 일행은 쌍계사를 향해 본격적인 지
리산행에 들어간다.
현재 쌍계사 입구에 해당되는 지점에는 집채만한 바위 두개가 길을 메운채 거대한 문(門)
을 형성하고 있는데 바위위에 새겨진 신라 최고명문 최치원(崔致遠)의 글씨가 눈에 확 들
어온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눠져 있는 바위문은 왼쪽 바위에 ‘쌍계(雙磎)’, 오른쪽
은 ‘석문(石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선생은 이 곳에 멈춰서서 “자획 크기가
사슴 정강이만하고 바위속 깊이 새겨져 있어 이미 천년이 흘렀건만 앞으로도 몇 천년이나
더 이어져 내려갈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라며 감회를 털어놓는다.
절측에서 마련한 음식을 든 일행은 17일 ‘어린달도라는 섬에 왜구의 배가 정박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산행을 포기할까 생각하는 등 한차례 소동을 겪는다.
다행히 우리 어선으로 확인돼 산행은 계속됐지만 당시 남해안지역에 왜구가 얼마나 자주
출몰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쌍계사를 지나 지리산 불일암(佛日菴)으로 오르던 중 남명은 “악사들이 북을 두드리거나
횡적이라는 악기를 불면서 앞장서고 두 기생이 그 뒤를 따르며 나머지 사람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치 꼬챙이에 물고기를 꿴 것처럼 줄지어 전진하였다”고 적고 있어 당
시 양반사회의 등산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남명은 불일암에 도착한뒤 부근 지역을 ‘청학동’이라 이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곳은 지
금의 하동군 청암면에 있는 청학동이 아니라 쌍계사에서 지리산쪽으로 2.5㎞ 올라간 곳에
있는 현재의 불일폭포 부근이어서 이채롭다.
굳센 적처럼 층진 벼랑이 막아 섰기에/ 찧고 두드리며 싸우길 쉬지 않는다./ 요(堯) 임금이
구슬 버린 것 싫어하여/ 마시고 토하길 쉰 적이 없다네.
남명의 ‘청학동폭포를 읊조림(詠靑鶴洞瀑布)’이라는 시다.
이 싯귀 중 ‘요 임금이…버린 것’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 포박자(泡朴子)에 나오는
“요 임금이 임금됨에 산에 금을 버렸다”에서 따온 것으로 부귀나 물욕을 버렸다는 말이
지만 여기서 남명은 물욕이 있는 세상일을 오히려 잊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남명 일행은 하산해 현재 왕성초등학교 부지로 변한 신응사(神凝寺)에 들러 융숭한 접대를
받은뒤 고향 합천으로 향하는 것으로 여행기는 끝맺고 있다.
도움말= 영산대 정우락교수. 남명학연구원 김경수사무국장.
▶청학동의 유래
옛날부터 많은 학자와 선비들이 지리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학동’을 찾아나섰다.
지금까지 청학동으로 추정되는 곳도 7~8곳에 이른다.
최치원을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은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꼈거나 아니면 숨어살기 위해 청학
동을 찾았는데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으로 알고 있는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대는 최근에 들어선 곳
으로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正儒道)’를 교리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
로 알려졌다.
물론 이 곳을 그 옛날 청학동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다.
정감록(鄭鑑錄)이나 고려명종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등 많은 문헌에 청학동
개념이 나타나고 있어 이상향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말해준다. 하동 악양 등촌리 청학골,
지리산 천왕봉 선비샘 아래 중봉골에 있는 상덕평마을, 구례의 피아골, 지리산 세석평전
등이 옛부터 청학동으로 지목되고 있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진주에서 서쪽으로 140리길에 청학동이 있다고 해 대략
남명이 답사한 불일폭포 부근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불일폭포 100m 전방에 폭포 유래를 설명하는 대형 입간판이 서있는데 간판 맞은편
언덕을 오르면 남명이 찾았던 불일암터가 있다.
산길 입구를 석축으로 막아놓았지만 200여평 규모의 이곳에는 대웅전으로 향했을 돌계단
이 그대로 있고 기왓장이 발견됐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그 옛날 남명이 지나갔을 산길과 집터가 곳곳에 남아 있어 이처럼 깊
은 산속에 마을터가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남명은 불일암 인근에 있었던 지장암에 찾아가 ‘모란이 활짝 피어있어 가지 하나가 마치
은구슬 한말을 모아놓은 듯 했다’며 이상향의 땅에 온 감회를 적고 있다.
- 국제신문 2001년 2월 22일자 기사내용을 보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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