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령에게 답함

      연전에 식도 공의 행차가 남쪽 고을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만나 뵙지는 못했습니다. 이번에 이 외딴 마을까지 보내 주신 서신을 문득 받고, 행차 중에 건강하심을 알게 되어 한량없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이 외진 시골에 살다 보니, 가끔 산승에 문전에 당도해도 신을 거꾸로 신고 달려가 반기는데, 하물며 왕손께서 소식을 전해 온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식은 근래 현기증이 매우 심해, 방안에 편안히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자리에 쓰러지기가 일쑤입니다. 누에고치 같은 신세가 되어 머리를 내밀 날이 없게 되었으니, 남들과 발길을 끊고 사는 이 심정을 명공께서 어찌 아시겠습니까? 더구나 세상 사람들의 의논이 다시 무거워져 화가 살갗에 닿을 듯하니, 허물을 살피며 깊숙이 숨어 살 뿐, 남들과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고명하신 공께서 저의 이런 심정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죽음에 임박한 날 앉아서 귀한 서신을 받았습니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으니, 회한이 구릉처럼 쌓입니다. 삼가 헤아려 주시기 바라며, 절하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