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현록> 뒤에 씀 (書景賢錄後)
선생께서 일찍이 뜻을 같이 하는 벗과 함께 지내면서 첫닭이 움면 함께 앉아 콧숨을 헤아려 마음을 통일하는 수식을 행하였다. 남들은 겨우 밥 한차례 지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자세가 모두 흐트러졌으나 유독 선생만은 횟수를 낱낱이 헤아렸고 먼동이 트도록 자세를 흐트러뜨리지를 않았다. 이 일은 이상이 장곤에게서 들었다.
선생이 남주 참봉이 되었을 때 귀복을 입고 회자를 하면서 온갖 연희를 한결같이 상관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 하였다. 후생들은 선생이 그렇듯 잘못된 풍습을 분별없이 좇고 따르며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때에 자신의 명예를 중히 여기면서도 자신을 평범한 사람과 구별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참으로 뛰어난 현인이 아니면 진실로 이런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생께서 처음 호를 사옹이라 지으면서 "비록 큰 비를 만나도 겉은 젖지만 속은 젖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이를 고치면서 "명호를 지어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과 한덩어리가 되어 살아가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을 보면 선생의 저 조심스럽고 온후한 도량과 재능이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라으로 인한 재앙이 선생에게 미칠 바가 아니건만 끝내 화를 면치 못한 것으 ㄴ천명이라 하겠다.
선생께서 형조 좌랑이 되었을 때 진사 신영희에게 달려가 그를 만나고서 "오늘부터 나는 그대와 절교하겠다. 지금 선비들의 기푸을 보니 동한 말기와 같아서 조만간 화란이 일어날 것이다. 나에게는 화가 이미 닥쳐서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바라건대 그대는 멀리 시골에 숨어 살기를 권한다."라고 말하였다. 신고이 이내 가솔을 데리고 사산 기슭에 가서 살며 호를 안정이라 하였다. 안정은 일찍이 남효온, 홍유손 등과 함께 죽림우사로 교제를 맺었다. 문장과 행의가 한 시대의 영수가 되니 벼슬하는 자로서 동남 지방을 지나가는 이는 반드시 그가 사는 것에 들러 예를 표하였다. 이일을 보면 선생은 당시 세상 일 돌아가는 기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니, 어찌 화란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 그 기미를 능히 보지 못했겠는가?
선생이 스승인 점필재를 어기게 된 것은 훗날 논의가 없을 수 없으나 이는 실로 선생이 스승인 점필재를 어길 수밖에 없는 경우였다고 하겠다.
선생이 추강의 벼이 위중할 때에 찾아가서 문병을 하였다. 추강이 문병을 거부하고서 선생을 보지 않으려 하니 선생은 친구 한 사람과 함께 문을 밀치고서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추강은 벽을 향해 누워서는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이 영결하고 말았다. 이는 추강이 일찍이 선생과 절교를 하였기 때문인데, 추강이 무슨 일러 말미암아 선생과 절교를 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홀로 헤아려 보건대 선생이 어찌 일찍이 인륜을 밝히는 가르침에 어긋난 일을 할 리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추강은 식견이 높아서 사화가 일어날 줄을 미리 알고서 일찍부터 선생과 절교하여 교유를 끊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선생이 안정과 절교하고자 하였고 추강이 선생과 절교를 하였으니, 당시의 험난하기 그지없는 세상 일은 철인이 아니면 그 화란을 벗아날 수 없는 것이었다 하겠다.
이장길은 여느 사람과 다른 사람은 아니었으나, 한때 이름을 날리던 인물 중에 그와 쉽게 대적할 이가 거의 없었다. 이를 두고서 당시 삶들이 일컫기를 자하와 희강은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 둘 다 보기 드물 게 기품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자하의 문장은 갑과에서 삼배를 할 정도였다. 당시 어떤 호사가가 이들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두 사람은 모두 국정을 떠맡을 기량을 지녔는데, 자하는 마땅히 장수가 되어야 할 것이고, 희강은 재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자하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렇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자하는 무과에 올라 무인이 되었는데, 훗날에 이르러 말할 수 없이 탐욕스럽고 도리에 어긋난 짓을 많이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니,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침을 뱉고 마구 욕을 하였다. - 추강이 한훤당의 문인을 평하면서, 그 가운데 재주가 뛰어나고 행실이 독실한 것이 스승과 같은 이로는 이장길이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