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論)

엄광론 (嚴光論)

      논하노라. 광무 황제 27년에 처사 엄광을 불러서 간의대부로 제수했으나 광은 끝내 제 뜻을 굽히지 않고, 부춘산에 가서 낚시질하다가 생을 마쳤다. 나는 엄자릉을 성인의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옛날 맹자가 제후를 만나 보지 않으면서 "한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펴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한 자를 펴기 위해서여덟자를 굽히겠는가?"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로서, 위로는 천자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아래로는 제후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그들은 비록 나라를 나누어 주더라도 이를 치수처럼 가볍게 생각하여 달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품고 있는 포부가 크고 가지고 있는 능력이 무거워 일찍이 남에게 가벼이 자기를 허여하지 않았다. 용을 잡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희생을 잡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 왕도정치를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은 패도정치를 하는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자릉이 양가죽 옷을 입고 초택 가운데 살면서 스스로 고기 낚는 사람이라고 하며 한나라를 위해 자신의 뜻을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았던 것은, 품고 있는 포부가 커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엄광이 광무 황제와 더불어 알고 지낸 친분이 다만 한 옛 친구정도가 아니었고, 서로를 예우함이 또 다만 임금과 신하의 예우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동한의 으뜸가는 신하가 되어, 제후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한 시대의 영화를 누렸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창 형통하려는 세상에 있으면서 시골 구석에서 늙어 죽음으로써, 그 도를 스스로 망가뜨렸겠는가? 또 자릉의 언론과 기풍을 상고하건대 뜻이 높아 세상을 깔보고, 영원히 떠나가서 돌아보지도 않은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이윤, 부열과 같은 무리였는데,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논하는 자 가운데는 "이윤이 걸에 대해서 다섯 번이나 나아가면서도 이를 마다하지 않았는데,자릉은 광무에 대해서 한 번 보고는 신하 노릇 하지 않았다. 탕임금이 이윤에 대해서 세 번 맞이해서 스승으로 삼았으나, 광무는 자릉에 대해 한 번 불러서 신하 삼으려 했다. 자릉은 이처럼 도를 행할 기회를 잃었고, 광무는 이처럼 어진이 대우하는 예를 잃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또한 용렬한 사람의 견해이니, 대롱을 통하여 보고는 하늘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어찌 자릉의 위대함을 아는 것이라 하겠는가? 저 자랑은 젊었을 때에 광무제와 더불어 교유해서 그가 기량을 한껏 펴더라도 반드시 <하,은,주> 삼대의 도로 다스리지 못할 줄 알고 다시 떠나가 버린 것이다. 만약 광무제가 양한의 가장 어진 임금이 되는 정도일 뿐이라면 광무의 재질만으로도 스스로 그 일을 하기에 족하니 엄광 자신을 기다릴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제왕의 도를 망가뜨리고 패자의 신하가 되어 한갖 높은 벼슬과 중한 녹만을 받으려고 했겠는가? 이와 같이 했다면 엄광이 편 것은 한 자고 되지 못하면서 굽힌 것은 여덟

자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하물며 이때는 미니생이 조금은 편하여 하나라 걸왕이 그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던 것과는 달랐으니, 민생을 급하게 여기는 뜻이 어찌 이윤과 한 가지였겠는가?

      가령 엄광에게 조금이라도 왕도정치를 실현해 보려는 뜻이 있었더라면, 광무제가 황제가 된 처음에, 마땅히 아침에 산을 나와 저녁에 임금을 만났을 것이다. 어찌 이십칠 년이나 되도록 와서 보지 않았다가, 물색한 다음 찾아내기에 이르렀겠는가? 애초에 엄광이 갖고 있었던 마음은 비록 광무제가 그가 거처할 동산을 아름답게 꾸며 주고, 비단을 쌓아 준다고 해도 끝내 그 도를 굽히려 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후세에 평가하는 사람이 패도정치를 실현하려는 관점에서 자릉을 본다면 광무에게 제 뜻을 굽히지 않았음을 지나쳤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란 관점에서 자릉을 평가한다면, 그가 광무르르 위해서 뜻을 굽히지 않았음은 마땅하였다.

      나는 그런 까닭으로, '자릉은 성인의 도를 추구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아아, 만약 이윤이 탕임금을 만나지 못했다면 마침내 유신의 교외에서 죽었을 것이고, 만약 부열아 고종을 만나지 못했다면 마침내 부암 들판에서 늙어 갔을 것이니, 도를 굽혀 가면서까지 벼슬하기를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령 자릉이 탕임금이나 고종 같은 임금을 만났더라면, 또 어찌 마침내 시골 구석에서 늙어 동강에 낚시질하는 한 늙은이로 지냈을 뿐이겠는가? 성현이 백성에게 마음씀은 한 가지이나 또한 그 만난 때가 다행함과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다.  - 원문의 '급생민'은 어떤 것에는 '우급생민'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