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란바바 10
길 없음


마두까르 : 당신은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서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노력도 깨달음을 발생시킬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우리와 대화를 하고 우리를 데리고 소풍을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까?


끼    란 : 나는 다만 당신들이 어떤 노력도 필요 없으며 도달해야 할 어떤 지점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신들을 일깨우려고 애써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에게 이것을 말하기 위하여는 어떤 방편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법회(法會 satsang)라는 이름의 방편을 만든 것입니다. 
           당신들이 단지 당신들의 언어만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도 당신들의 언어로 말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모임을 법회(法會 satsang)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나는 법회에서 어떠한 수행(修行)도 행하도록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법회라는 명칭 아래서 당신들을 나에게 오도록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여기에 오면 나는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단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나의 깨달음에 당신들도 눈뜨도록 일깨우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모든 것이 마음의 장난일 뿐임을 이해하면 됩니다. 
           당신들은 깨어나 이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법회라고 불리는 우리의 모임에서 매일 저녁 끝 없이 이 노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법(法)도 없고 회(會)도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말하는 정겨운 모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길 모퉁이에 서서 사람들에게 이길은 어디로도 이끌어 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내가 말 없이 그곳에 서 있다면, 
           당신들은 내말을 듣지도 못할 것이고 나를 이해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다가와서 방향을 물을 수 있는 자그마한 안내소를 만든 것입니다.
           당신들이 내 안내소를 방문하면, 나는 당신들에게 "제발 수행과 노력의 길을 가지 마시오! 
           그 길은 깨달음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내"라는 간판을 내건 목적은, 사람들이 진리를 들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두까르 : 그렇다면 당신은 "길 없음"이라는 간판을 내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끼    란 : 일단 사람들이 나의 안내소로 오면, 나는 그들에게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웃음) 
           "안내"라는 간판은 길을 보여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나는 안내소에서 안내원 노릇을 하며 앉아 있습니다. 
           길을 찾는 사람들은 안내원에게 이끌립니다. 
           그들이 나의 안내소에 들어서면, 나는 그들에게 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법회는 하나의 방편이요 구실일 뿐입니다. 
           소풍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의 언어로 '소풍'은 자연 속에 함께 있으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노력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할 길은 없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말하기 위하여 소풍이라는 기회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먹고 쉬어라. 그리고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렵습니까? 소풍은 명상캠프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것도 수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것을 소풍이라고 부릅니다. 
           당신들은 자연을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풍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좋은 방편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건 나는 항상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시오. 내면을 보고 깨어나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 단순한 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나는 모든 이런 속임수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법회와 소풍은 결코 심오한 무엇이 아닙니다.


마두까르 : 우리는 "존재하라." "깨어 있어라." "너 자신을 받아들여라." "존재를 받아들여라."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받아들임'과 '깨어 있음'은 무아(無我) 상태에 관한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표현입니다.

끼    란 : 이 말들은 단어들로 표현된 무아 상태에 관한 표현들이지요. 
           당신이 당신의 잠과 꿈에서 깨어날 때, 당신은 "나는 깨어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들을 가지고 당신은 깨어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받아들임'과 '깨어 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내면의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깨어 있음을 정말로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받아들임' '깨어 있음'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내면의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