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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송
우선 第五의 如理實見分에서 말씀하신 「무릇 있는 바 모습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인 줄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올 것이니라」도 좋고 第十의 莊嚴淨土分에서 말씀하신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러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 응당 빛깔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질림과 요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도 좋고, 第十八의 一體同觀分에서 말씀하신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일새니라. 무슨 까닭이냐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당장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오는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도 좋고, 第二十一의 非說所說分에서 말씀하신 「수보리야, 여래가 중생을 중생이라 함은 중생이 아니요, 이 이름이 중생임을 말함이로다」도 좋고, 第二十六의 法身非相分에서 말씀하신 「만약 빛깔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지라, 여래를 뵈옵지 못하리라」도 좋고, 마지막인 第三十二의 應化非眞分에서 말씀하신 「일체 하염있는 법은 꿈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으며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여겨볼지니라」도 좋으니 아무 구절이라도 마음에 들고 문맥이 잘 소화되는 것을 가려서 그 뜻을 밝혀 낸다면 우선 無我理에 통하고, 無我理에 통하면 따라 마음에 能緣과 所緣이 끊어지고, 마음에 能緣과 所緣이 끊어지면 다음엔 胸中이 落하여 맑고 깨끗하며 허공으로 더불어서 둘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115).
청정심은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따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르심과 같이, 빛깔을 보되 여의어서 머물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낳음은 智人의 마음씀이다. 빛깔에만 머물러서 그 마음이 굴리임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움 같고, 빛깔에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굴림은 허공에 구름이 거침과 같음이니 마음의 달은 길이 빛을 놓을 것이다. 浮雪居士도 노래를 부르시되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판가름이 없고 귀는 들음에 소리가 없으니 옳그름이 끊어졌구나. 판가름과 옳그름을 모두 놓고 다만 마음부처를 보아서 스스로 귀의할 뿐이로다.」하셨으니 그 마음씀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듯이 道人은 눈으로 보되 그 보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판가름이 사라지고 귀로 듣되 그 듣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하여금 옳그름이 끊어졌으므로 되돌아서 온갖 법의 판가름과 옳그름을 잘 처리하되 붙이지 않고 머물지 않은 것이니 이 當處인지라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시는 소식이라 하겠다. (136)
佛이라면 형상과 사리를 이름이 아니고 眞理를 이름인 것이다. 圓明하고 심寂한 청정법신을 일컬음이다. (156)
이 경의 소식이야 말로 물로 능히 적시지 못하고, 불로 능히 태우지 못하나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가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고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또한 오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니 情識으로 이를 바 아니며, 思量으로 용납할 바 아닌 文字性까지라도 빈 금강반야바라밀다인 소식이다. (162)
모습이 모습 아니니 또한 부처도 부처가 아니요. 이러히 있음과 없음을 갖추어 세우지 않는데 이러히 天眞面目인 부처는 호올로 나투는 것이다. (165)
모든 法이 本空임을 알고 經義를 요달하여서 生死想을 쓸어내면 겁내고 두려운 생각이 사라질 것이니 참으로 드뭄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무슨 까닭으로써이냐 본래로 父子가 同氣이니 또한 同家인지라 어찌 일찌기 놀래고 겁내고 두려움인들 따로 있겠는가 (178)
諸相이 本空하니 無生에 머물 것이요 衆生이 本寂하니 無生을 제도하여야 할 것이다. 무슨 뜻인가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니므로 낳음도 곧 낳음도 아니요 죽음도 또한 죽음이 아니니 생김도 아니고 꺼짐도 아닌 그 당처를 가르치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人我가 不生하고 覺照가 不滅함이니 이것이 바로 不住에 머뭄이요 無生을 제도함이 아니겠는가 이 소식이 여래의 本領이요 여래의 本心이시니. .(180)
이 마음이 法性面으로는 無邊法身인 여래지마는 用相面으로는 無盡衆生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알아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니 세상 사람은 이 마음이 앞 경계에 부딪쳐서 굴리이고 뒷 경계에 끄달려서 굴리일 때마다 변하고 또 다시 변하면서 뛰쳐 나오는 識인 알이를 그릇 인정하고 마음이라 고집을 한다. 이 알이인 妄心은 앞의 생각과 당장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엇갈리고 섞갈리면서 흘러가는데 생각생각이 일어나고 꺼짐이 정지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천만갈래의 차별心數를 낳아 놓는다. 이 차별心數을 가리켜 들뜬 마음이니 삿된 마음이니 망녕된 마음이니 따위로 표현하는 뭉치마음이지마는 여기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되 찰라에도 생기는 새김과 꺼지는 새김을 두지 아니하고 다시 생기고 꺼짐을 없애려고도 않음을 이름하여 非心인 「아닌 마음」이라 하며 이미 생기고 꺼짐을 좋이 없앨 것도 없음일진댄 오직 묘하게 맑고 뚜렷이 밝은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꺼지지 아니함을 眞心 곧 참마음이라 이른다 이렇듯이 숱한 뭉치마음의 그 當處를 알고 한 생각을 뛰칠 때 이 바로가 곧 眞心이요 이 바로가 곧 常心이요 이 바로가 곧 佛心이요 이 바로가 곧 반야바라밀다心인 것이다. (222)
古人도 이르시되 莫言空打坐하라 예?? 勝別勞心이로다 번역하여 「퍼질러 앉음만을 말하지 말라 오히려 따로 마음을 굴림이 나으리라」하신 것이다. 실로 有爲가 비록 거짓이라 겠지마는 버린즉은 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無爲가 비록 참이라겠지마는 헤아린 즉 聖果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福慧雙修가 大道의 基本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231)
문) 어찌하여 괴로움과 슬픔의 중생이 있습니까?
답) 괴로움은 즐거움의 상대요 슬픔은 기쁨의 상대요 중생은 부처의 상대이니, 즐거움을 따로 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고 기쁨을 따로 찾기 때문에 슬픔이 생기고 부처를 따로 바라기 때문에 중생이 생기는 것이니, 너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놓고 슬픔과 기쁨을 버리고 중생과 부처를 여의면 비로소 참 즐거움과 참 기쁨과 참 부처를 이루리라. 왜 그러냐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슬픔과 기쁨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중생과 부처는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다. 이렇듯이 하나인 절대性의 진리를 깨치지 못하고 둘인 상대性의 幻相에만 사로잡히면 도깨비 굴에 떨어진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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