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 스승의 말씀입니다

 

 

수행과 경계

만주의 헌병대에서 살아나긴 했지만, 백봉은 여전히 종교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백봉은 일정한 직업 없이 지냈다.
물론 주위에선 취업을 하도록 종용했지만, 그의 마음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게 되고, 
해방 후에도 격동하는 현대사의 조류에 휩쓸려 모진 시련과 좌절을 겪었다. 
이러한 시련과 좌절로 인해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있었는데,
하지만 56세 때 불법을 공부하기 전까지 그의 종교관은 앞서 말했듯이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 절에 가게된 일화는 당시 불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날 절을 다니면서 참선 공부를 하던 친구 신 선생이 백봉에게 절에 가자고 권유했다. 
그때 백봉은 이렇게 대답했다. 
"좋네,그럼 술은 내가 사지. " "뭐라고! 술?" 어이가 없어진 신선생이 화를 냈다. 
"거 참,이상한 인간이다. 
돈을 내가 내서 사겠다는데,어째서 성을 내지?" 
백봉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왜 화를 내냐고 물었다. 
"아니,절이 무슨 술 마시는 곳인 줄 압니까?" 신선생이 물었다. 
"그럼,경치 좋은데 절이 있지 않은가? 
 그런 곳에 가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서 마시는가?" 
"어허..." 신선생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백봉도 기가 막혔다. 
신선생은 신선생대로 백봉은 백봉대로 기가막힌 판국이었다. 
신선생은 절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불교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참선이나 화두 등에 관한 얘기와 견성을 하면 엄청난 경지에 오른다는 등의 말이었다. 
얘기를 들은 백봉은 
불교 공부나 견성은 되는 사람이나 되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선생은 계속 백봉에게 불법을 공부하도록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공부를 못하고 마음을 바로 갖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럼 공부를 하면 지옥에 안떨어집니까?" 백봉이 물었다. 
"지옥이 붙을 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지옥에 떨어집니까?" 
이 말을 들은 백봉은 굉장히 놀랐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지옥이 붙는다,안붙는다니! 
평생 나쁜 짓 안하고 일제에 항거하고 육영사업도 했지만, 부모님에게 효도도 하지 못했고,
처가에도 잘 해드리지 못했으며, 또 술을 너무나 좋아하고,평소에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던
백봉은 자기가 지옥에 들어가기 십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이 공부를 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백봉은 단순하게 남의 말을 믿어버리는 성격이었다. 
후에 그는 
'내가 어리석었기에 오늘의 존재 가 있는 것이지 똑똑했다면 오늘의 존재가 없었을 것'
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어리석음' 때문에 공부를 하면 지옥에 안 떨어진다는 말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백봉은 도반들과 함께 관악산에 있는 절로 갔다. 
절에 도착한 일행은 주지 스님을 만나 인사를 했다. 
여기서도 도반들은 주지에게 삼배를 하는데 백봉은 절을 할 줄 몰라서 당황을 했다. 
억지로 절을 마친 백봉은 주지에게 엉뚱한 부탁을 했다. 
모두들 견성(見性)이 어렵다고 하므로,
가만히 생각해보니 견성은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놓은 엉뚱한 말이었다. 
"견성같은 것 말고 요술이나 배워주십쇼.
 돈 나와라 하면 돈이 나오고,누가 미우면 때려줄 수도 있는 요술말입니다." 
주지 스님은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마음과 올바른 생각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견성을 합니다. 
요술을 배울 힘으로 좋은 걸 배워야지 나쁜 것을 배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나서 주지는 그를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라니를 외우면 견성한다고 하면서 다라니를 외워보라고 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백봉은 집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외우기 시작해서 밤까지 부지런히 외웠다. 
그렇게 사흘을 외웠다. 견성이 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혼자서 그는 그 절의 주지를 찾아가서 물었다. 
"내가 사흘 동안 잘 외웠는데,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아,견성한다고 해서 내가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래요. 아니,일평생해도 될까말까라고들 하는데,
사흘 동안 다라니를 외웠다고 해서 견성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까? " 
"예,그렇습니다. 난 하면 철저합니다." 주지는 기가 막힌지 웃었다. 
그리고나서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면 화두를 가지라고 하면서 무(無) 자 화두를 주었다. 

이렇게해서 백봉은 화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한달 반 정도는 화두가 잡히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화두를 잡았다가도 자꾸 놓쳐버렸다. 
그는 고난과 좌절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되새기면서 반드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졌다.
이 공부를 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를 새롭게 다지자, 
그 뒤부터는 화두가 슬며시 잡히기 시작하면서 별별 환상이 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환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좋은 환상이 아니었다. 
구렁이를 생각하면 머리가 열두개씩 달린 구렁이가 나타나고,
돼지가 나타나서 물려고 달려 들고,
여럿 달린 사람의 머리가 나타나는 등 나쁜 것이 수없이 나타났다. 
망상에서 비롯된 무서운 환상이었다. 
공부하다가 미치는 수가 있다고들 하는데 정말 미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봉은 이러한 환상이 다 헛것이며 비과학적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환상이 나타났다가도 이내 사라졌다. 
나중에는 절도 나타나고 스님들도 나타나기도 하고,
급기야는 태양과 달같은 광명이 나타났다. 
방 안에서 불을 끄고 참선을 하는데, 밖의 광경이 그대로 보였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색(色)도 나타났다. 
밖에 있는 솔나무 잎 하나하나가 그대로 선명히 보였다. 
오히려 대낮에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것도 망상으로 보았으며, 망상이긴 하지만 좋은 경계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인천에서 살았는데, 늘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고는 내려 갔다. 
또 워낙 술을 좋아한 그는 술 마시는 일을 빠트리지 않았는데,
그같은 술자리에 앉아서도 마음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술좌석에서도 광명이 나타나자, 그는 옆사람에게 물었다. 
"자네,저 광명이 보이는가?" "아니, 무슨 광명?" 옆사람이 대답했다. 
백봉은 자신이 환하게 광명을 보았다면,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광명이 마음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차츰 차츰 깨달아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그는 화두 공부를 집어 치우려고 했다. 
화두 공부를 하는 중에 몸이 너무나 괴로와 죽을 것만 같았다.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으나,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그는 화두 때문에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두가 딱 들러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화두를 버리려고 했지만, 화두는 떨어지질 않았다. 
화두를 버리려는 그 마음이 화두를 갖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화두를 갖게 되었다. 
'내가 팔자가 나쁘니 이 공부를 해야겠는데, 화두가 떨어지질 않으니 그대로 갖고 있자. 
또 도반들이 화두를 깨면 굉장하다고들 하니 죽으나 사나 갖고 있자'-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한 백봉은
 처음엔 무자 화두가 육조 스님에게서 나온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두를 계속 참구하다보니 육조의 환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백봉은 그 육조의 멱살을 잡고 지근지근 씹어서 뱃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자 육조의 환상이 '날 살려다오' 하면서 아우성쳤다. 
백봉은 그 환상을 향해 어째서 무(無)라고 말했는지 답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무자 화두가 육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조주 선사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육조에게 너무나 미안함 을 느낀 백봉은 육조의 환상을 뱃 속에서 토해냈다. 
밖으로 나온 육조의 환상은 사라지면서 한마디 했다. 
"기추,그 양반 되게 무섭네." 
백봉은 다시 조주를 머리부터 지근지근 씹어 뱃 속에 넣고는 화두를 참구했다. 
어느날 그는 밤새도록 참선을 하다가 문득 아침을 알리는 고동 소리를 들었다. 
잠시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갑자기 방 안이 환해졌다. 
백봉은 '이거 또 망상이 일어나는구나. 헌데 이 망상은 좋은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보니 하얀 옷을 입고 갓을 쓴 분이 세 분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망상은 이상하구나. 좀 두고봐야겠다." 
당시 그의 앞에는 그림이 한 장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사람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때 앉아 있던 세 분 중 한 분이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그림이 저 하늘의 달과 원리가 하나다. 
 그런데 기추,네가 분별이 많기 때문에 그 원리가 하나인 줄 모를 따름이다. " 
이 말을 들은 백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말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자기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리킨 곳 을 보니 정말 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달이 없을 때라는 것을 백봉은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사라졌다. 
백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이니 결국은 망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경계를 체험한 며칠 후 백봉은 도반들과 다시 암자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공부하겠다는 도반들만 남녀 합쳐서 아홉명이 모여 보름간을 정진하기로 하고 갔다. 
며칠 전에 기이한 경계를 체험한 백봉의 심경에는 이미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그 변화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백봉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뜨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들뜸은 아주 좋은 느낌이었다. 
절에 가자 들뜬 마음은 더욱 심해졌다.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었고 잠을 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들뜬 것이 마치 내 보물을 내가 어디다 간직해 놓고 내가 잊어버리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백봉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발견한 도반들은 서로 의논을 해서 암암리에 그를 돌봐주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이제는 밥을 먹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이상함을 느낀 신선생이 백봉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백봉은 묵묵히 따라나갔다. 
이상하게도 말조차 하기가 싫었다. 
도반들이 자길 돌보기 위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돌봄이 고마왔지만,
이상하게도 말이 하기 싫었다. 
두 사람은 5-6백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로 내려 갔다. 
평소에 말이 많던 신선생도 그날따라 말이 없었다. 
백봉은 내심 이상히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이상하게 걸음을 걷는데도 발이 땅을 딛는 느낌이 없었다. 

마을을 걷다가 백봉은 어느 나무 아래서 앉자고 말했다. 
신선생도 아무 말 없이 따라 앉았다. 
백봉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점점 더 커져갔다. 
뭔가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확실히 잡히지를 않았다. 
백봉은 다시 절로 가자고 말했다. 신선생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다시 절로 돌아갔다. 절에서는 매일 모여서 예불을 했다. 
도반들은 견성성도(見性成道)하길 기원하는 원(願)을 세우면서 예불을 드렸다. 
간절한 염원 때문에 도반들은 전부 눈물을 흘리면서 예불을 하였다. 
그러나 백봉은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젊은 시절 청년 운동과 대중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백봉은 
대중과 함께 생활을 할 때는 대중을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하루가 지난 뒤 예불을 드릴 때는 눈물이 나올락말락 하다가 다시 쏙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목탁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목탁 소리가 딱 딱 딱 하면서 단음절로 들려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둘로 들리는 것이었다. 
백봉은 옆의 신선생에게 물 었다. 
"자네,목탁 소리가 몇 개로 들리나?" 
"목탁 소리가 하나로 들리지 몇 개로 들리겠소?" 
백봉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자기 귀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옆을 바라보니 신장(神將)이 보였다. 
바로 옆에 서있는데, 마치 탱화의 그림처럼 멋진 갑옷과 칼을 차고 있었다. 
백봉은 요즘같으면 총을 차고 양복을 입고 있어야 할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옆의 도반에게 물었다.
"자네,여기 신장이 보이지 않나?" 
"신장이라니 무슨 신장이 있다고 그래요. 아무 것도 없는데." 
백봉의 눈에만 신장이 비친 것이었다. 
백봉은 자기가 귀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눈까지 고장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 공부를 해 서 견성을 하면 굉장하다고들 하는데,
이제 귀 병신 되고 눈 병신 되는데 무슨 공부를 하겠는냐는 생각이 들자 그때서야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 눈물도 조금 나오다가 말았다. 
결국 사람들과 한 방에서 참선과 예불을 하는데 거북함을 느낀 백봉은
되도록이면 방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가서 참선을 했다. 
당시는 겨울이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쌓였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백봉은 아무 바위에나 앉으면 그대로 화두 참구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공부의 방법도 체계도 단 하나 아는 바가 없었지만, 한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몰랐다. 
몇시간씩 보내긴 일쑤고 어떤 때는 밤을 샐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