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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비르 9
두 선율 사이의 침묵
19.
누가 신이 있는 것을 알고 있겠는가 까비르는 말한다 [나무를 모르는 자여 너는 결코 숲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서는 결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20.
사두여, 내 나라에는 슬픔이 없다 높은 자여, 거지여, 그리고 수행자여 나는 그대들에게 외친다 영원한 집에 들어가고자 하는가 오라, 모두 오라 내 나라로 오너라 목마른 자여. 지친 자여 여기 그대 짐을 벗어 놓아라 형제여, 여기 살아라 여기 피안으로 가는 나뭇배가 있다 이 나라에는 땅도 없고 하늘도 없다 달도 없고 별마저 없다 오직 진리만이, 진실만이 내 어머니의 궁전에서 빚나고 있다
까비르는 말한다 [형제여, 사랑하는 형제여 <빈 것> 이야말로 진리의 심장부이다]
오쇼라즈니시 강의
** 사랑은 기적이다. 사랑은 천국으로부터 지옥까지의 사다리다. 사랑을 알게되면 모든 것을 알게된다. 사랑을 놓치게되면 그대 삶 전체를 놓치게된다. 신에 관하여 묻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신에 관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아는 ㅅ람은 신을 알고 있다. 사랑은 신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 신에 대해서 묻지말라. 그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소리다. 그를 들을 수 없다면 그대가 귀머거리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를 만질 수 없다면 그대가 손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문제가 없다. 신은 지금 여기다. 모든 것은 신이며 신 속에 있으며 신은 모든 것이다. 신은 탐구를 통하여 찾아지는 것일 수 없다. 그대여 어디에 가서 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모든 곳에 있다.
** 사랑이 없으면 삶은 지루하게 된다. 희색 빛이 된다. 여기 색깔도 없고 노래도 없고 축제도 더이상 없다. 인간은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면서 죽음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여기 여기 색깔을 가져온다. 사랑을 통하여 희색이 무지개색으로 변한다. 한개의 색깔이 수백가지 색깔로 변한다. 그리고 지루함과 무거움은 황홀경으로 변한다. 사랑은 그대 내적 존재 본질 전체를 변하게한다. 이는 존재 전체의 변화다. 신과 이 세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다. 이세상은 성스럽다. 사랑은 마술적이다. 까비르의 가르침 전체가 이 사랑이다.그는 사랑을 성스러운 음악이라 부른다. 가슴이 사랑으로 두근거릴 때 그 사랑은 신의 입술 위의 피리가 된다. 여기 음악이 태어난다. 이 음악이 종교다.
** 종교는 교회에 있지 않다. 종교는 종교의식 속에 있지 않다. 종교는 그 가슴이 사랑으로 두근거릴 때만 일어난다. 우리 각자 안에서 종교는 태어나야한다. 그대가 사랑 속에서 태어날 때 종교도 그대 속에서 태어난다. 이제 그대 삶 전체는 음악이,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 삶, 사랑, 죽음 이것은 삶에 있어서 세가지 중요한 요소다. 삶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대는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 죽음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대는 지금 묘지로 가는 중이다. 여기 그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뿐이다.
** 릴케의 시 나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두 선율 사이의 침묵이다. 죽음과 탄생의 선율.
** 돈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죽음을 귀중히 여기는 것과같다. 돈은 그대에게 거짓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죽음과 삶이 만나는 곳, 죽음과 삶이 서로 포옹하는 곳, 삶과 죽음이 오르가즘의 상태로 들어가는 곳, 그 두 선율 사이의 침묵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그토록 우리를 매혹 시킨다. 그것은 삶이기 때문에. 거기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또한 죽음이기 때문에. 릴케는 이를 왜 어둠이라 하는가? 사랑은 어둠이다. 사랑을 속삭일 때 사람들은 밤을 택한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밤과 사랑은 유사성이 있다. 낮에 사랑을 나눈 다는 것은 약간 추하다. 또한 시장 가운데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도 비정상이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환경이 필요하다. 어둠은 언제나 깊다. 그러나 빛은 깊이가 없다. 사랑은 어둠과 같다. 깊은 휴식,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간다. 죽음 역시 어둠이다. 사랑과 죽음은 여기 유사성이 있다. 우리는 사랑 속에 살고 사랑 속에 죽는다. 사랑 속에서 죽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하여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바란다. 죽음 그리고 부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멜로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만남이다. 오르가즘적인 만남이다. 죽음과 삶의 만남이다. 사랑을 모른다면 그대는 실패했다. 많은 것을 놓쳤다. 너는 두 선율 사이의 침묵을 놓쳤다. 저 침묵은 가장 높은 정점이다. 까비르는 이를 성스러운 멜로디라 부른다. 이를 성취하는데는 다음의 네 단계가 있다.
** 1. 첫 단계는 지금 여기이다. 사랑은 지금 여기서만 가능하다.과거와 미래는 잊어라. 과거와 미래는 생각을 부른다. 생각은 느낌을 파괴한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가슴이 있다는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다. 사랑 속에 그대전체를 던져 버릴 때 그 사랑은 신이 된다. 사랑은 신의 시작이다. 사랑의 절정은 신이다.
** 2. 두번째 단계는 사랑을 통해서 이 성스런 멜로디를 통해서 그대의 그 독성을 넥타르(감로)로 변질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미움, 시기, 분노, 소유욕 등의 독성에 의해서 오염되어있다. 독기가 가득차 있을 때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라. 그저 기다려라. 이것이 삶의 기본 법칙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바빠해야하는가? 분노가 온다. 그러나 분노는 곧 갈 것이다. 기다려라.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분노로 하여금 거기 그렇게 있도록 하라. 분노를 누르지도 말고 분노를 따라가지도 말라. 긍정적일 때 행동하라. 그러나 억지로 긍정적이려고하지 말아라. 저절로 긍정적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 이것이 비결이다.
성스러운 것을 개어게 주어라. 우리는 반대로 들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말라고 들었다. 남에게 주는 것 만을 우리는 가질 수 잇다. 사랑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과 정비례한다. 사랑은 움켜쥐고 있어야할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빛이다. 나누어 가져야할 향기다. 나누어 주면 줄수록 더욱더 갖게 된다.
**3. 세번째는 그대의 긍정적인 것들을 나누어 가짐이다. 그대 사랑을 나누어 가져라.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나누어라. 그대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움켜쥐고 있지 말라. 그대의 그 지혜를 나누어 주라. 기도, 사랑, 행복, 기쁨. 나누어 줄 사람이 없으면 개나 나무에게라도 주어라. 움켜쥐면 모든 것이 독이 된다. 나누어 주면 그대는 자유로워진다. 나누어 줌은 영적 행위이다.
** 4. 네번째 단계는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개다 하는 생각이 들 때 멈추어라. 여기 사랑은 더이상 흐르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것도 없음 속에서만 살 수 있다. 텅 비어버릴 때 거기 사랑이 있다. 그러나 에고로 가득차면 사랑은 사라져버린다. 사랑과 에고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예수의 말을 들으라 마음이 빈자가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 까비르는 말한다. 신을 어디가서 찾는가? 누가 신이 계신 곳을 알려 주는가? 신의 거주처는 어디인가? 사람들은 숲속에서 숲을 찾는다. 여기 나무들이 있다. 그러나 숲은 어디있는가? 이런 사람들은 정신이 나갔다. 나무를 부정하고 더이상 숲이 어디있는가? 숲은 이 나무들 속에 잇다. 이 나무들이 숲이다. 신을 묻지말라. 신을 발견하라.
이 세상에서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신에게로 가는 창문이다. 어린아이, 바위, 풀잎. 저 어리석은 모습들을 보라. 이슬람이 기독교와 싸운다. 이슬람이 흰두와 싸우고 서로 죽인다. 신을 위해서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다. 추상적인 신을 위해서 실체적인 신을 죽이는 것과같다. 까비르는 말한다. 이것은 진정한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대신 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 이 사랑 속에 신을 발견한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ㄱ신은 무엇인가 그렇게 묻지말라. 차라리 사랑속으로 가라. 그 사랑을 통하여 신이 그대에게 온다. 신에 대한 이해는 이론이나 설명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올 것이다. 이것이 가슴의 길이다. - 사두여 내 나라에는 슬픔이 없다. 사랑 속에는 진정한 사랑 속에는 슬픔이 없다. 거기 아직 슬픔이 잇다면 그대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사랑속에서 그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에고가없는 삶은 겸손한 삶이다. 단순한 삶, 신 속에서의 삶이다. 그대는 여기 빈 대나무가 된다. 신의 음악이 그 대나무를 통하여 넘쳐흐른다.
** 보라 에고가 강하면 강할 수록 슬픔도 거지 정비례한다. 그것은 마치 상처와 같다. 에고가 사라지면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누가 그대를 욕하더라도 전혀 상처받지 않는다. 상처받은 그대가 사라졌는데 도대체 누가 그대를 상처내겠는가? 에고가 없으면 승리와 패배가 무엇이 다르랴. 모든 차별은 에고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모든 패배와 좌절은 에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에고가 없을 때 그대는 승리도 패배도 없이 살게 된다. 그대는 거져 단순하게 살아간다. 단순한 삶이 바로 종교적인 삶이다.
** 올바르게 산다면 24시간동안 이런 식으로 산다면 하루에도 수없이 피안에 닿게될 것이다. 신은 수없이 그대를 관통할 것이다. 신의 빛이 그대를 뚫고 지나갈 것이다. 길을 걸을 때, 밥먹을 때, 또는 한 송이 꽃을 보고 있을 때 그대는 발견할 것이다. 그대자신이 어느새 피안에 와 있다는 것을. 피안이란 지구로부터 먼 다른 은하계가 아니다. 피안은 지금 이곳이다. 그대의 그 각성속에 이해 속에, 그리고 명상속에 피안은 있다. 저 언덕은 그대 곁이다.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이 세상속에서 이세상과 더불어 살아라. 그러나 이세상이 그대 속에 들어와 살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 까비르는 삶의 긍정자였다. 그는 이 삶 속에서 이 삶과 더불어 이 삶을 지지하며 살았다. 신을 체험한 사람은 누구든지 이 삶의 지지자가 된다. 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신의 것이다. 이 삶으로부터 도망가면 그것은 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이 삶이야말로 신을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더이상 어느곳으로도 가지말라. 이것이 진짜 탈출이다. 그 어는 곳으로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는 그대 심장 한가운데로 잠적해 버릴 수 있다. 심장 한가운데서 희말라야 동굴을 만들 수 있다. 저 언덕은 바로 그대 곁이다.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
** 빈 것이야말로 진리의 정수다. 진리는 추상적인 개념속에 없다. 진리는 종교의 경전 속에도 없다. 진리는 바로 여기 지금이다. 진리는 여기 지금 체험할 수 있다. 진리는 그대 가슴속에 있다. 사랑은 진리와 그대를 잇는 다리이다. 여기 지금 이 세상과 더불어 살아라. 에고는 그대를 분리시키지만 사랑은 그 분리된 것을 다시 이어준다.
** 시인은 오직 그 시를 쓴 순간에만 신과 연결된다.
** 그대는 나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숲은? 숲은 나무가 아니다.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다. 집합명사다. 하늘 저 높은 곳에 신은 존재할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신이라는 집합명사를 이루는 개체들-신적 요소들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성스럽다. 신을 알고 싶거든 우선 사람을 사랑하라. 이 하나의 구체적인 개별체들이야말로 신에게 가는 문이다. 말에 너무 잡히지 말라. 신이라는 이 말은 진짜 신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 말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불이라는 말에 데인 사람은 없다. 언어를 버려라. 생각하기보다는 느끼라. 더욱더 느끼라. 어느날 그대는 흔적도 없이 용해되고 거기 신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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