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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道川書院)의 현판 내림 청원소(疏) -
숙종34년 1706 상소의 첫머리의 사람은 박항태(朴恒泰)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을 숭상하고 공(功)을 갚는 것은 써진 임금님의 거룩한 은전(恩典)이옵고, 어짐을 그리워하고 도(道)를 존중한다는 것은 선비들의 공정한 의논인 것이옵니다. 만일에, 도학(道學)이 출중해서 후인들에게 사표(師表)가 되고, 올바른 행위가 백세(百世)에 모범이 되는데도 신주(神主)를 섬겨 모신 곳에 그 이름의 현판을 걸라는 은혜를 입지 못하면, 그것은 곧 국가가 베푸는 예법의 흠이 되온즉, 선비들이 애석히 여겨 탄식함을 무엇에 비하오리까? 신(臣) 등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 왕조의 유학(儒學)의 현인(賢人)인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의 도덕 학문 충효 절행(道德 學問 忠孝 節行)은 일세의 모범이어서 천년에 이르도록 사람들을 격려함이 되오니, 어찌 다만 시골 선생으로서 사당에 제사 지내야 할 분이오리이까? 그런데도, 100년되는 사당에 아직껏 빛나는 사당 호(號)의 현판이 없어, 지금토록 왕가(王家)가 아직도 표창의 거행을 궐(關)한 채이오니, 이는 한 지방의 선비들이 개탄스러워하고 애석히 여기는 바이옵니다. 그래서, 신 등이 서로 사람들을 이끌고서 부르짖는 것 이옵니다. 신 등이 국사(國史)에 실린 바와 선배들이 찬양하여 높인 바 그리고 역대 어진 임금님이 장려하신 바로서 청원드림은, 그 실상(實狀)을 대강 들어 주상께서 마음에 느끼심에 대비하는 것이옵니다. 문익점은 진주(晋州) 강성현(江城顧)의 사람으로 고려 시대 말기에 태어나셨습니다. 학교 교육이 쇠약해져 무너지고 온 세상이 다 불교로 내닫는 것을 보시고, 분개하고 한탄하며, 전해 졌다가 끊어져 가는 학문을 다시 일으킴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니, 올바른 도를 부르짖어 밝히고 이단을 배격하며 사람들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효도 우애 충성 신의를 주장했나이다. 공민왕 때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글을 올리어서 정치를 위한 도를 논함에 고금에 통하는 말 수천 마디를 했는데, 이치를 명확히 하고 참되고 올바르지 않 음이 없었사옵니다. 그 분은 누차 간관(談官)을 제수받았사온데, 직언(直言)함을 꺼리지 않아 고상한 성명(聲名)이 맑게 뛰어났습니다. 만년에는 병이라 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즉 시국의 일을 미리 깨달아 알고서 스스로 편안히 지내자는 뜻이었나이다. 고향의 마을로 돌아가서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삼우거사(三憂居士)라 하였는데 국운을 떨치지 못함과,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기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었나이다. 나라가 바뀌는 혁명이 있었던 때에는, 절조를 지키며 생애를 마쳤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고수하여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밝힘으로써, 일대(一代)의 명성(名聲)을 수립했는데, 진실로 평소 학문의 정대(正大)와 지조가 단단하지 않았던들, 그 분의 행(行)한 바가 어찌 그 같이 탁월했사오리이까? 그 분의 효행에 있어서는, 실로 천성(天性)에 뿌리를 두었나이다 일찍이 모친의 상을 당해서 산간(山間)에서 지내었는데, 왜놈의 도적들이 왕성함을 만나 그것들이 지나가는 곳은 처참하게 멸망하게 됨에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숨었으나, 그 분만은 상복을 입고 제물을 드리어 묘 앞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고 죽기를 맹세하고 떠나지 않으니, 도적들도 감탄하여 효자라 하고 감히 해치지를 않았던 바 비록 강혁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求)한 것이나 화추(華秋)가 도적들을 감탄케 한 것이 어찌 이보다 더 나으리이까? 또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가, 국가의 일로 남방(南方) 되놈 땅으로 귀양을 가서 구속 당하고 곤액(圈厄)을 당했음이, 다만 소무(蘇武)가 백설(白雪)의 움막 속에서 고생을 겪은 것 같음이 아니었건만, 절개 지키기를 더욱 단단히 했나이다.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옴에, 길에서 목면의 씨를 입수하여 붓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는데, 드디어 온 나라에 크게 번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받고, 국가는 그 힘의 덕을 보았사오니, 그 분은 또한 우리 나라의 후직이옵니다. 고운 솜을 가져온 혜택과 그 씨가 먼 데까지 펴지게 한 덕(德)이 또한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하오나, 이것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었나이다. 고려사의 찬(贊)을 살피옵건대, "문익점은 다만 목면의 이익에만 공(功)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학문에 힘을 써 바른 도(道)를 부르짖어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온 나라가 좋지 못한 것에 물들여진 것이 씻기어지고, 천리(天理)의 어둠이 다시 밝아지며, 글을 숭상하는 풍습의 망해진 것이 다시 떨쳐졌으니, 우리 나라 도학(道學)의 종(宗)이라 할 수가 있다. " 라 일렀고, 또 전의 어진 분인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擺)이 지은 효자비각기에 "공에게는 올바른 행위가 있었고, 또 글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라 하였고, 또 "공의 효성(孝誠)은 죽는가 사는가의 마당에 다달아 나타났고, 박탈할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國朝)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라 하였으며, 또 "공이 만년(晩年)에 병이라 하여 벼슬하지 않은 것은, 생각건대, 또한 일찍 앞을 내다보고 닥쳐오는 운명을 기다렸던 것이니, 즉 공의 큰 절개는 이에 더 나타났던 것이다. " 라고 했사옵니다. 그리고, 전의 어진 분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말한 것을 살펴보면,"문익점의 공덕이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막대한 것은, 다만 목면의 이익을 가져온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유가(儒家)의 학문(學問)에도 공이 있었다고 했고, 또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충선공) 문익점은, 우리의 유도(儒道)를 서로 계승할 수가 있어서, 우리의 유도(儒道)가 찬연히 다시 세상에 밝아졌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그 학문을 체득하여 우리 나라에 전해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안(安) 문(文)의 두 분이 아니었던들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도 추잡한 되놈의 행실을 면(免)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했사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믿어지는 진실을 기록하는 임무가 있거늘 사관한테서 이미 그렇게 칭찬을 받았고, 아첨하여 남을 사모하고 남을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은 어진 분으로서는 하지 않는 일이온데, 전의 어진분들이 높이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사온즉, 이가 믿어지고 증거정이 아니오리이까? 다만 이것뿐이 아니오라,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는 그 분의 공덕을 미루어 칭송하사 그 고향에다 포창하라 명하시었고, 벼슬을 내려 주고 시호(論號)를 내리시었으며, 훈공(勳功)을 기록하시고 사당(祠堂)을 짓고 전토(田土)를 하사하셨사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봉작(封爵)을 더 높이시고, 묘 앞에 제사를 드리게 했사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친히 글을 지으시어 묘에다 제사 드리게 하시고 제전을 불리시었나이다. 아, 보통이 아닌 큰 공이 있었음에 반드시 보통이 아닌 큰 보답이 있는 것이오니, 역대 어진 임금님의 융성한 포창과 두터운 보답이 어찌 도에 넘은 것이오리까. 일찍이 명종15년(1560)에 고을 안의 노인들과 도내의 유학생(儒學生)들이 이구동성으로 뜻을 같이하여, 도감사(道監司)에게 글로 호소를 하여 도감사가 임금님께 아뢰게 되어서, 단성(丹城)의 도천(道川) 위에 사당을 창건하였사온 바 그 곳은 문익점이 살고 덕(德)을 닦았던 곳이었나이다. 제사는 비록 그 분이 살던 옛터에서 지내고 있사오나 포창하여 하사하시는 현판은 이미 되어 있는 사당에 아직 궐(關)된 채이옵기에 선비들의 실망은 말할 수 없사오니, 이것은 어진 임금님 세상의 예에 흠이 되는 일이 아니오리이까? 아, 우리의 주상전하께서는 유도(儒道)를 숭상하시고 덕을 존중하시옵니다. 그래서, 비록 한 가지의 절개나 한 가지의 스스로 좋아하는 행위를 잘 행함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포창하여 이름을 높여 주시고, 공경하여 모범으로 삼게 하시지 않음이 없사온데, 이제 문 충선공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에 만은 두 자(字)를 쓴 빛나는 현판 내리 시기를 묵살하실 수가 있겠사옵니까? 자고로 도학이 있는 사람이라고, 반드시 절개를 지키는 행실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반드시 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이다. 그러하온데, 문 충선공은 그의 학술(學術)을 논하오면,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이룬 학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의 곧은 절개를 말씀하오면, 백이숙제(伯夷叔齋)와 같은 인물이 었다고 말할 수 있사오며, 그의 올바른 행위를 생각하오면 비록 증자, 민손에 비견한들 그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을 표창하는 방식은 유달리도 한 가지의 절개를 지킨 사람이나 한 가지의 좋은 행실을 한 사람에 대한 것만도 못하오니, 이 어찌 유학의 불행이며 선비들의 부끄어움이 될 뿐이겠나이까? 이는 진실로 또한 어진 임금의 교화(敎化)를 더럽힘에 작은 일이 아니옵니다. 신(臣) 등은 이에 스스로가 반성되고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사온데, 멀리 시골에 있지만 예절에 어둡고 언행이 똑똑하지 못한 것들이고, 어진 교화(敎化)를 흡족히 받지 못한 것들이지만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사옵니다. 그러나 아직껏 현인을 사모하는 실적을 내지 못하와, 사당을 건립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바친 지 거의 100년이 되었사온데도, 아직것 어진 임금님의 융성한 은전이 막히고, 고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붙이는 곳 됨에 불과하게 하여, 옛날 현인의 자취로 하여금 없어져 나타나지 못하게 했사옵니다. 그래서,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가 절하여 행해지지 않고 있음에, 옛날 송(宋)의 주자(朱子)가 노산(盧山)에서 개탄하신 일을 생각하오면, 즉 이같은 일 때문에 그 개탄을 발로(發露)한 것이오니, 이는 신(臣)들의 슬퍼하여 마지않는 바이옵니다. 이에 감히 한 도의 선비들을 이끌고 발을 싸매고 천리길을 와서, 같이 소리를 내어 전하께서 들어주시도록 우러러 부르짖어, 감히 두 자(字)의 현판 내리시는 은혜를 청원드리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많은 선비들의 지극한 소망을 굽어 살피시사 일을 담당하는 관원(官員)에게 곧 명하셔 서 그 표시를 들어 걸게 하시어 유도(儒道)의 요행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또 엎드려 아룁건대 새로 국가의 금지령이 있어서 무릇 새로 사당(祠堂)을 짓고 현 판을 청원하는 상소(上疏)는 전하께 받들어 드림을 허락치 않는다 하오나 지금이 사당집의 건립은 거의 100년이 되옵니다 이미 오늘날의 새로 창립한 것이 아니옵고, 본현(本縣)의 밖 다른 데에 사당을 설립한 일이 없사오니, 중복되게 설립한 것도 아니옵니다. 그러하오니, 쾌히 허락의 말씀을 내리시어 특별히 사당집 호(號)의 현판을 하사하셔서, 제사 지내는 사묘(祠廟)를 훤하게 꾸미게 하시오면, 충성스러운 현인(賢人)에게 은덕 갚는 은전이 흥되는 바 없게 되고, 선비들의 보고 느끼는 뜻에 황송히 여겨 감동되는 바 있을 것이오니, 그 어찌 후세에 길이 칭송하는 말씀이 있지 않으오리이까? 신 등은 연연히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옵고, 삼가 죽을 죄를 범하오며 아뢰나이다. 숙종(肅宗) 34년(1706) 임금님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의 말씀을 내리시었다 "소(疏)를 살펴 다 잘 알았도다. 선비들의 씩씩한 기운이 떨쳐지지 못했기로, 지금토록 현판을 드리지 못해서 내 어진 임금들의 두터운 은전에 어김이 되었으니, 애석하고 한탄스럽기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 일을 맡은 부처(部處)로 하여금 영을 받아 처사하고 아뢰게 할지니라,"
도천서원에 현판 다시 내림의 청원소(疏)
경기 경상 전라 3도의 유학 선비들이 올렸는데 일의
첫머리의 사람은 이형복(李亨復)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영남(嶺南) 단성(丹城)의 도천서원(道川書院)은, 즉 문익점(文益漸)의 영혼을 모신 곳으로 세조대왕 때에 창건하고, 이름을 쓴 현판을 하사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되 봄 가을에 제전(祭典)을 올리어 폐하지 않았나이다. 그러하온데, 일찍이 임진(壬辰)의 병화(兵火)를 겪고 나자, 사당의 집채가 무너져 부숴지고 하사받은 현판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었나이다. 만력(萬歷)의 임자년에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전의 터에다 서원(書院)의 집채를 다시 짓고, 비록 전의 이름을 따라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 했으나, 다만 옛현판대로의 것을 사사로이 걸기가 어려워, 그만 고을의 사당(祠堂)과 같이 되어진 채여서 관(官)에서 제사 지내는 예가 빠졌사온데, 이는 즉 전쟁을 치른 나머지 일에 겨를이 없었던 탓이었나이다. 앞서 숙종대왕 때의 무자년에, 영남의 유학선비 박항태가 상소(上疏)하여 현판의 하사를 청원드리니, 즉 임금님께서 대답의 말씀을 하시기를, "선비들의 씩씩한 기운이 떨쳐지지 못했기로, 지금토록 현판을 드리지 못해서, 내 어진 임금들의 두터운 은전(恩典)에 어김이 되었으니, 애석하고 한탄스럽기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라 하시고, 곧 예조로 하여금 상의해서 아뢰어 처사케 했습니다. 그러나, 일을 맡은 예조가 우물우물 넘기어 아직까지도 시행을 안 했사옵니다. 영조대왕께서 말씀 내리 시기를, 우리 나라가 300년 전 이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강성군이 목면(木綿)을 가져옴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공이 강성 군보다 큼이 없다. "라 하시고는, 제사 모시고 있는 사원에서 제사 지내게 명하셨고, 전하 께서는 조종(祖宗)의 정치를 잘 계승하심에 마음을 쓰시어서, 사당을 수리케 하시는 일이 있었사옵니다. 아, 역대 어진 임금님들의 은공 갚는 은전과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이, 이같이도 지극했고 다 바쳐졌는데도, 선비들의 씩씩한 기운이 떨쳐지지 못했기로, 현판을 다시 거는 일이 지금토록 성취(成就)가 미루어졌사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나라 안의 현인(賢人)이 이 제는 한 고을의 어진 사람과 같은 격(格)이 되었고, 옛날에는 관(官)에서 제사 지냈던 것이 이제는 개인의 제사로 떨어지게 되었나이다 이에 선비들의 한탄이 이미 형언할 수 없사온데, 어찌 국운(國運)이 강성한 때의 은전(鳳典)에 흠이 있는 것이 되지 않으오리까? 그리고 또,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어진 왕조(王朝)가 충성을 포창하고 절의(節義)를 장려하며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마당에서, 비록 한 가지의 절개나 한 가지의 좋은 행실을 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포창되지 않음이 없이 공경하여 표본됨을 지니게 했사온데, 하물며 충효 절의 도덕 공(功)과 교화력을 함께 갖추어 그것들이 다 세상에 나타난 사람이야 다시 말할 것 있겠사옵니까?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문익점의 곧은 충성과 돈독한 효도,그리고 깊은 학문과 큰 공은 진실로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 이를 수가 있사옵고, 만세(萬世)에 영원히 힘을 입힌 사람이었나이다. 그 분의 도학(道學)을 논하오면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문을 본받았고, 그 분의 절의(節義)를 말하옵자면 백이, 숙제가 더 훌륭했다고 양보가 안 되오며, 출천(出天)의 효행은 증자(曾子) 민손(閔損)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사옵고, 사람들에게 이익과 혜택을 끼친 것은, 후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사와 비록 가가호호가 다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또한 그 분의 공을 갚기에는 족하지 못한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을 표창한 바의 은전은, 오히려 한 가지의 절개를 지키었다든가 한 가지의 좋은 행위를 행한 사람에 대한 것에도 미치지 못하오니, 이 어찌 유도(儒道)의 불행이 아니겠사옵니까? 대체로 국내의 서원(書院)과 고을 사람끼리 제사 지내는 사당(祠堂)은 본시 물론 같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예조의 문서(文書)에 그 사원(祠院)의 이름을 쓴 현판을 하사받았는가 여부에 따라서 기록한 서원(書院)과 고을 사람끼리 제사 지내는 사당인 향사(鄕祠)는 아주 명백히 구분되옵니다. 도천서원을 말씀하온다면 특서(特書)해서 서원이라 했사오니, 즉 세조대왕께서 현판을 하사하셨음이 또한 분명하옵니다. 아, 도천의 현판은 본시 조정의 명령으로 없앤 것이 아니라 실로 병화(兵火)의 재가 되었던 것이옵고, 그리고 서원의 집이 다시 지어진 지 거의 200년이 되옵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어진 임금님의 융성한 은전의 길이 막히고 사사로이 사모하는 뜻을 붙이는 곳이 됨에 불과해서 전 세상 현인(賢人)의 자취로 하여금 없어져 나타나지 않게 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敎化)가 결여되고 행해지지 않음에 신(臣)들은 스스로 억울한 마음 간절하므로 이에 널리 의논한 바를 연명해서 우러러 부르짖사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지시고 밝으신 전하께서는 특별히 옛 현판대로 복구시키시옵고, 곧 제물(祭物)의 제사로 하여금 옛 의식(儀式)을 새로이 갖추게 하사 백세토록 선비들의 공의(公義)가 불멸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요행이겠나이다. 임금께서 결정해서 말씀하시기를, "아뢴대로 시행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어, 왕가의 은공 갚는 뜻을 보이되, 관(官)으로는 도내의 시종수령(侍從守令)으로 정해 맡기어서,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 내림을 기다렸다가 곧 제례(祭禮)를 행하게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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