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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덕 재(도천서원내의 강당)기 (盛德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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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18, 1818년 7월 일 생원(生員) 오우상(吳弱羽) 지음
성덕재는 단성(丹城)의 도천서원(道川書院)의 강당이다. 서원은 고려조(高麗朝)의 학자 충선공(忠宣公) 문 선생(文先生)을 위해서 설립된 것이다. 우리 나라는 바다 밖 너머에 있어 단군(檀君)의 태고시(太古時)에는, 백성들이 일정한 장소에 살지 않았고, 농잠(農蠶)과 정전법(井田法)은 기자(雲子) 때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기자는 즉 중국인(中國人)으로서 우리 나라 사람이 되었다. 우리 나라 땅에서 생산(生産)되는 것은 모시풀의 베와 흰모시었는데, 삼베는 더울 때의 옷 만들기에 쓰이고 비단은 천(賤)한 사람이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풍속이 아직은 가죽옷과 삼베옷을 입고 무의있는 베옷은 없었다. 오늘의 눈과 같이 흰 무명베는 실로 선생이 북경(北京)으로부터 붓대 속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돌아오셔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넓힘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옷이 있게 되었고, 길(吉)한 일의 때와 흉(幽)한 일의 때에, 제복(制服)을 달리하고, 천후(天候)가 추을 때에 얼어 죽지 않게 되었다 모든 역사를 고찰한다면, 원래 중국과 우리 나라의 일어남은, 요임금 때와 같이 운을 탔고 오곡(五穀)은 은(殷)나라 말에 나오게 되었는데, 면포(綿布)는 고려(高麗)의 끝 시기에야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두 가지가 나오게 된 서로의 시간차는 천여 년이나 되고, 현인군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루어졌으며, 의식(衣食)의 근원은 그 지나온 바가 먼 옛날이기도 하다. 의식은 천하의 큰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성인(聖人: 요순임금)은 배불리 먹고 따습게 입고 편히 살면서도 가르침이 없음은 천하의 큰 근심이 된다고 하여, 앞잡이가 되어 천하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큰 윤리(倫理)를 체득했는데 그 도(道)는 부자(父子) 군신(君臣)간의 일로부터 시발(始發)이 되었다. 이에 덕(德)을 바르게 하고 생활을 넉넉히 하며 화목(和睦)을 하게 된다면, 천하를 잘 다스릴 수 가 있는 것이다. 선생은 세상에 탈이 날 틈이 많은 때를 당하셔, 일찍이 몽고족(蒙古族) 나라의 조정에서 씻은 옥(玉)의 빛을 나타내고, 남방(南方) 되놈 땅인 변방에서 고생하시게 되어, 만리(萬里) 밖에서 구속 당하고, 곤란 중에서도 즐거워 하시었다 이에 의(義)는 시랑(對狼) 같은 자들의 위협(威脅)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덕흥군(德興君)인 왕혜(王謠)와 최유(崔漏)의 반역도당을 살피시어, 마침내는 간사한 자들의 간담이 무너지게 해서 되놈지의 얼굴빛을 고치게 했던 것이다. 만사(萬死)의 고통 끝에 우리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고려의 기강(紀綱)이 이미 무너졌음을 보시고는 정계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시어, 9년간이나 사람들을 접(接)하지 않으셨다. 이윽고 천명(天命)이 떳떳하지 못함을 통탄하시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기에 자숙(自肅)을 하셨는데, 이가 곧 선생(先生)의 임금 섬기시는 태도였다
당시에, 상례(喪禮)가 무너져서 사대부가 모두 상을 당한 지 100일에 복을 벗었는데, 공(公)만은 흘로 묘지키기를 3년을 하며, 슬퍼하는 예(禮)를 다 갖추어 세속을 따라·그 천성(天性)을 바꾸지 않으셨다. 모친상(母親喪)을 당하고 계실 때, 바다 도적들이 미쳐 날뛰고, 선비나 여인들이 뿔뿔이 달아났으나, 공만은 홀로 상복을 입고 묘 앞에 무릎 꿇고 앉으셔서, 소리내어 울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시니, 도적들이 서로 바라다보며 감탄하고는 묘의 옆 나무에다 명백하게 쓰기를,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다시 경내에 들어가지 않고, 전현(全縣)이 온전하게 되었는데, 이가 곧 어버이 모시는 정성이었다. 전조 즉 고려조는 선생의 그 행위를 가상히 여겨 효자리(孝子里)라는 효자비를 세됐다. 우리 이씨조선은 선생의 절개를 높이어 충신의 정문을 세우고 포장하시니, 전해지는 명성이 빛났다. 역대의 임금님 때에 더욱 포장하였는데 공이 전한 면(綿)의 옷을 입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느끼게 하였다. 공은 또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지켜야 할 큰 윤리(倫理)를 밝힘이 있었으니,공이 이 나라 백성들에게 끼친 것이 크지 않은가? 공의 학문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요망함에 머리 訃은 중에 의해서 정치와 사회가 흐리고 어지러워지자, 탑(塔)과 절이 구름을 가리고 부처를 찬미하는 불가(佛家)의 노래가 하늘 닿도록 요란하였다. 이에 6경(六經: 시경,서경,역경,예경,낙경,춘추)은 소홀히 여겨져 유행(流行)되지 않고 윤리에 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땅에 떨어져 행해지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이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글이 우리 나라로 전해 온 것을 보고도 거기에 무슨 말이 씌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포은(圖隱)정몽주(鄭夢周) 반남(潘南) 박상충등의 여러 어진 분들과 같이 유학(儒學)을 강(講)하는 벼슬에 선출되었는데, 드디어는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들어 미묘한 이치를 연구하고 깊이 터득하여서, 분연(奮然)히 침체되고 있는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고 이단(異端)을 배격함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셨다.
그래서, 상소하여 먼저 학교를 건설하고 사당을 지어 신주(神主)를 모시며, 되놈의 복제(服制)를 고치고 의창(義倉)을 두어야 한다는 의론(議論)을 펴고 주장하섰는데, 이것들은 다 후세의 법도가 되었다. 고려(高麗)는 큰 나라였음에, 진실로 마땅히 정직하고 훌륭하기 가 세상에 나기 드문 신하가 있어서, 왕실의 빛을 위해서 그 끝맺음을 크게 해야 했다. 공 같은 분은 참으로 기자(淇子)가 세운 나라에 태어나 장성(長成)했음을 부Rm러워 하지 않고, 나가 벼슬을 하고 물러나 집에 거처하는 도(道)와 학술(學術)이 먼저 단단히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들은 그 어짐을 어질게 알아 스스로를 착하게 할 수가 있었고, 일반 민간인들은 그 이익을 이익 삼아 스스로 살 수가 있으니, 옛날에 큰 덕을 잊을 수가 없음이라고 말한 그 큰 덕이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리라.
사당(祠堂)은 세조의 신사년5)에 되어졌는데, 그것은 조정의 명(命)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임진(壬辰)의 난리에 불탔으나 광해군(光海君) 경신년( 1620)에 다시 건립했고, 정조의 정미년(1787)에 이르러서, 현판이 다시 내려졌는 바 앞의 시대는 도천(道川)이라 하고, 서 있는 산은 집현산(集賢山)이라 하며, 있는 마을은 오리동(梧里洞)이라 한다. 백세토록 이 사당에 올라 공의 풍도(風度)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곧 또한 산천동학(山川洞壑)에서 구하기를 세상에 나타나는 이름을 돌아 보고 떨치어 일어남일 것이니, 많은 어진 이들이 모이게 되어 아마도 어진 분의 훌륭한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로다.
노산정사병설기 (蘆山精舍병設記)
- 도천서원이 철폐후 중건 되기 전 사용한 정사
1871년 음력 3월 16일 후학 안동 권상적(權相迪) 지음 지금 우리는 삼우선생(三憂先生)에 대한 사모심을 붙일 곳을 가졌다. 정사(精舍)를 창건하였는데, 즉 이 땅에 집짓되 선생이 살으셨던 옛땅이고 선생의 신(神)이 머물러 계셨던 땅을 다시 다듬은 곳으로 이곳의 이름은 노산(麗山)이다 그러므로 노산정사(麗山精舍)라 했다 이 노산정사의 자초지종은 흥망의 깊은 도리(道理)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아, 우리 선생은 우리나라의 올바른 학문의 종(宗)에다 경하여 만세에 전할 특별한 공훈까지를 지니시었다. 생각건대 도천서원(道川書院) 또한 마땅히 다른 훈공(勳功)이 있는 분을 모시는 사원과 같이 영구히 전하게 함이 타당한 바였다. 그런데 결국 근년(近年)에 철폐하는 서원에 끼게 된 것은 즉 먼 시골 사람들의 천박한 정을 임금님에게 달(達)하게 할 틈을 갖지 못했으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래서 도천서원을 헐어 버린 뒤 쓸 수 있는 것을 주워 모아 향교의 터 밑에다 약간의 서까래를 얹어 얽어매어서 그저 임시로 흥학재(興學齋)라는 명칭을 붙였다. 10여 년이 지나서 이곳에다 옮겨 놓고 선생의 묘각(墓閣)과 서로 바꾸어 새롭게 해서, 지금은 사재(思齋)와 한 곳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우연히 아니다.
생각하건대, 선생에게 전에 제사 모시었던 일곱 사원들을 다시 세움은 기약이 없고, 선생을 문묘(文廟)에 모실 것을 청원(請願)한 일이 여러 차례였음에도 임금님의 허락하시는 답(答)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방(南方)의 많은 선비들이 탄식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고을 원님인 유(柳)사또에게 도 지킴을 고하여 협의했으니 그 모양 그대로 산수(山水)의 경치가 우리 선비들이 영원히 의지하여 따르는 바가 되겠도다. 거기다가, 이 지방의 승경(勝景)이 산은 대성산(大聖山)을 근원으로 하여 뻗어났고, 강으로는 신안강(新安江)이 베개처럼 흘러 기이하고도 우연스러우니, 이는 또한 남방(南方)의 한 기록할 곳이다. 정사(精舍)는 남쪽을 향해 있고 5각형의 집으로 되어서 오른편의 현판에는 앙지헌(仰止軒)이라 하였고, 왼편의 현판에는 학이재(學而齋)라 하였는데 내 일찍이 이 이름을 곰곰 살펴보았거니와 무슨 생각한 바가 있었음이던가? 특히 이 정사는 삼가 주자의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의식을 취하여, 그것에 널리 더할 것 과 줄일 것을 참작했고, 매년 음력 3월 1일과 9월 1일에, 모이는 많은 선비가 선생의 종이신주를 모시고는 분향을 하고 참례(참禮)를 한다. 그 일을 마치고 나서는, 서로들 읍(揖)을 하고 예(禮)를 지키며 술을 마시는 잔치를 벌이는 등의 예절을 행하고, 그리고 고을의 선비들이 같이 지켜야 할 규약을 닦고, 경학(經學)을 강(講)하니 감화시키는 거리의 촛불의 끝빛과 노래와 음악의 인재를 교육하는 밝은 교화(敎化)가 이와 같으니, 유도(儒道)를 닦는 사람들의 교화가 다시 떨쳐지게 되었다. 유도가 전해짐이 있다면, 즉 그것은 이 단성(丹城) 언덕의 노산정사(蘆山精會)로부터일 것이니, 장차 우리 나라의 백세 후까지 뛰어나고 높게 있을 것이로다.
삼우당(三憂堂)의 도학과 은혜스러운 공에 대해서 라면, 국사 및 유학자 사회의 글에 빛나게 펴져 있으므로 후학이 감히 찬미하는 한 마디를 할 것이 아니지만, 이제 나는 동지 성주(星州) 이도영(李道영)과 외람되게 이 일에 참여했고, 그리고 후손 문재록(文在祿) 및 정하(正夏) 등의 여러 사람이 또한 같이 의논하여 힘을 썼기에 드디어 이 글을 짓노라. 고종 8년(1871)에 수많은 서원(書院) 중에서 47개소만 존속시키고, 나머지를 철폐시 도천서원도 철폐되어, 고종 28년(1891)에, 그 대신 노산정사(蘆山精會)가 건립되었다
노산정사蘆山精舍) 병설 후기(後記)
1898 음력 2월 상순 후학(後學) 성주인(星州人) 이도영(李道영) 삼가 지음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文先生)이 처음으로 면(綿)을 심는 것을 가르치시고 백성들이 무명옷을 입게 한 공은 후직과 짝이 될 수 있다고 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백세토록 잊지 않음은 마땅한 일이다. 선생에게는 더욱 큰 공이 있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의 되놈 복장이 선생이 아니었으면, 바꿀 수 없었던 것이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되놈식 복제를 중화식(中華式) 복장으로 변경하게 한 것 또한 선생의 덕택이다. 선생은 고려의 끝 시기에 되놈의 예식을 쓰고 불교(佛敎)를 숭상하던 때를 당해서, 발분하여 우리 유학(儒學)에 뜻을 두시고는, 포은(圃隱) 목은(牧隱)을 벗삼아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문을 강(講)하시었고, 강성(江城) 땅에서 상제의 거처소를 지키시고, 교지땅에서의 충정을 다하신 일은 되놈들씨나 중화(中華)사람들이 다 본 것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을 논(論)하는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옷을 입혀 준 공을 말하고, 학문과 충효에 있어서나 유학을 위함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시고 세상의 풍습(風習)이 잘 되게 도와 우리 이씨조선 오백 년 간의 문명적 정치를 열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어둡기도한데, 이는 역시 선생을 알음이 얕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 후직은 순임금의 신하 다섯 사람 중의 하나로 성인의 짝이 될 수 있는데도 시경(詩經) 서경(書經)에 말해져 있음은, 한결같이 우리들을 먹인 공(功)에 대해서만 찬양하고 감탄하였다 선생이 우리들에게 옷 입힌 공은, 다만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춥지 않게 했을 뿐에 그치지 않고, 실로 되놈의 풍속을 고치게 할 바탕이 되셨으니 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로다. 강성(江城)은 선생께서 태어나신 고향이다. 서원을 도천(道川)에 세워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려 높이 받들고, 조정에서는 현판을 내리시어 표창을 하셨는데, 이제는 제사를 폐(廢)하고 서원은 빈터만 있게 되었다. 고을의 선비들은 사모하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지자, 노산(蘆山)의 기슭에 자리를 잡아 수간의 정사(精舍)를 짓고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제사 지내는 의식을 대체로 모방했다.
노산은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다. 정사 건립에 대한 사실은 기록 중에 자세히 말해 있다. 벗 권상적(權相迪)이 실질적으로 이 일을 주관했고, 죽은 내 아들 회근(晦根)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거들었다. 이런 고로, 고을 사람들이 내게 한 마디 말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명이 없는 것과도 같이 병고(病苦)를 오래 겪고 있는 처지인데 차마 말을 하랴. 그러나 고을 사람들의 부탁을 거듭 어기었고, 또 세상이 천했던 사람들이 교만을 부리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선생한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벌벌 떨어 몸을 가누지 못할 것 같은지라 아픔을 참고 분수에 넘는 것을 잊고서 감히 한 마디 말을 하여 이 곳에 와 놀고 쉬는 이들에게 고(告)하노라, 원컨대, 제군(諸君)은 충효로 근본을 세우고 학문을 하여 일을 하신 바를 잊지 말라. 그러면 곧 좋지 않으리오. 정말 좋지 않으리오.
노산정사기 (蘆山精舍記)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잔 춘추관 수찬관 1894년 음력 정월 일 전주인(全州人) 이교하(李敎夏) 삼가 지음 우리 나라는 신라 고려 때로부터 이씨조선에 이르도록 모든 유명하고 어진 분에게 은덕을 갚음에는, 도학(道學) 충효(忠孝) 훈공을 가지고 각기 계제에 따라 사당(祠堂)에 모시고 서원에 모시었으되 구별에 아무런 한계선이 없었다. 그러나, 세 가지의 큰 업적을 함께 갖춤으로써 제사를 받은 분을 말할 것 같으면, 오직 우리의 삼우당(三憂堂) 문선생뿐이다. 선생은 고려 종말기(終末期)에 높은 벼슬에 계셨고,좋은 학문 좋은 행실 좋은 공(功)을 경하여 갖춤이 남보다 뛰어나셨다. 이에 우리 이씨조선의 역대 어진 임금님께서는 자주 포상을 내리사 강성군에 봉하시고 부민후(富民候)에 봉하셨으며,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시고 충신공의 시호를 주시며, 제사를 지내어 주시되 제문(祭文)에는,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밝히고, 효도를 지극히 지키고 충을 다했다.(정조 때 내린 강성사(江城祠)의 현판과 제문의 내용)라 하셨고, 또 "우리의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었으니, 그 공(功)은 곡식을 먹게 한 후직의 공과 같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러 도학(道學)의 대가(大家)들이 서로 이어 찬미하고 칭송했음이 빛나게 책들 속에 실려져 있으니,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을 베품이 지극했다. 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은 모두 일곱 사원이고, 문묘(文廟)에 모시기를 청원(請願)했음이 또한 네 번이었다. 토정(土亭)의 시에 이르기를 "지금토록 오두막집 에서 강성군 제사 올린다 라고 한 것은, 집집마다 숭배한다는 것을 이름이다. 그런데, 근래에 모든 서원의 철거를 명하심에 단성(丹城)의 도천서원 또한 달리 남게 된 공신 충신들의 서원과 같이 영구 보존하게 되지 못했다. 그래서, 헌 것을 수습하여 향교(鄕校)의 터 밑에다 임시로 집을 지어 배움의 집을 일으켰다. 그러나,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집은 되어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땅 선비들의 여론은 답답하게 막힌 채 몇 해를 지냈는데, 지난 신묘년 봄에 해려(海閭) 권상적(權相迪)이 비로소 많은 선비들과 상의하여 계책(計策)을 세우고, 고을을 다스리는 유도기(柳道夔)와 협의하여, 배움의 집의 약간의 재물을 가지고 정사를 본현(本添)의 북녘에 있는 노산의 기슭에다 다시 지었는바 이곳은 선생이 사신 옛곳이자 선생의 묘 옆이다.
즉 이 정사에서는 주자의 창주정사에서 행해져 온 의식을 참작하고 취해서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초하룻낱에 많은 선비가 모여 선생의 종이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분향(努香)하고 참배를 한다. 그리고는, 고을의 선비들이 같이 지켜야 할 규약을 닦고 경학(經學)을 강(講)해서 그 의의를 넓힘에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임은, 아마도 옛날 서원에 모시고 제사올렸던 일에 못지 않고 유학을 흥하게 함이 더욱 빛이 나는도다.
후손인 문정욱(文正都)이 해려(海閭) 영감의 편지를 가지고 와 나에게 한 마디의 글을 청하였다. 나는 평소 사모하고 받들었으나 늘 사모하는 마음 붙일 곳이 없음을 한탄했더니, 이제는 노산을 천연스럽게 우러러보게 되어 감히 붓에 먹을 적시는도다. 그런데 대체 후학들이 전의 현인을 사모함은, 다만 그 도를 지키고 그 덕을 존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름지기 마땅히 먼저 그 도와 그 덕을 배워야 할 것임에, 우리들은 이를 힘써야 할 것이다. 1898년 음력 3월 하순 후학 응천(難川) 박상태(朴尙금) 지음 생략 1901년 음력 5월 5일 후학 행주인(幸州人) 기우만(奇宇萬) 지음 생략 1919년 음력 12월 하순 고을 후학(後學) 성주인(星州人) 이도복(李道復) 지음 생략
도천서원중수기 (道川書院重修記)
순조5년 1801 년 월 일 성균생원(成均生員) 유문용(柳波龍) 지음 서원(書院)은 집현산(集賢山)의 서쪽 도천(道川)의 위에 있고, 삼우당 문선생을 모신다. 선생은 고려 말기의 분으로 충성은 중국에 떨쳐 나타났고, 효도는 외국 되놈들을 감탄케 했으며, 도학(道學)은 우리 나라 선비들을 인도했고, 공리(功利)를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끼치 시었다. 역대(歷代) 임금님들의 포창과 벼슬 주심이 이미 계속 잇달아 있고 여러 어진 분들의 찬미 또한 많았으니, 마땅히 백세토록 토셔 제사 올림에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 이 현(添)의 남쪽 배양산(培養山)에는 정문(雄門)의 각(閣)이 있고 그 각 안에는 비가 있는데, 그 비에는 효자리(孝子里)라 새겨져 있는 바 이곳이 곧 선생이 사시던 터인 것이다. 사손(祀孫)이 집안의 화를 피하느라 그 곳을 지키지 못하자, 선생의 증손녀이고 참봉(泰奉) 이씨(李氏)의 영부인(令夫人)인 문씨(文氏)가 96세에 도감사(道監司)에게 글을 올려서 신안사(新安祠)를 묘의 옆에 또세웠다. 그리고, 부인의 손자로서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께서 불렀으나 나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이원(李源)이, 아우와 더불어 가만히 부인의 편지글을 가지고 고을 노인들과 상의를 하여서 사당집을 증축하고 제전(祭閨)을 두었는데, 이에 대한 말은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지은 비각기(碑閣記)에 있다. 그 때의 사당집과 제전은 지금 보존되어 있지는 않다. 현재의 도천서원은 즉 유학 선비들이 낸 진정으로 종손이 살던 옛터에 지어진 것이다 서원은 1461 세조7년에 창건되고, 1564,명종9년에 옮겨졌으며, 선조25에 불에 탔고, 1620 광해12에 다시 지었으며, 또 무너지자 현종13 1672에 서쪽 기슭에 옮겨 지었고 정조11 1787년에는 다시 현판을 내리고 제사 지내게 하셨다. 생각건대, 서원(書院)의 서원됨은 오래 가야만 하거늘 오래 되면 상하게 되고 상하면 수리하게 되는 것인데, 선비들의 정성이 한가지로 같지 못하고 부족했었다. 금년에 이르러, 선생(先生)의 후손들이 하나로 마음을 모아 재물을 내어 또 묘와 정문을 수리하고 나서, "선조의 사당을 잘 다스리지 못함은 자손들의 잘못이다. "라 말하고는, 드디어 공인(工人)에게 맡기어 기등을 갈고 지붕을 뜯어 고치었는데, 권시(權翅)와 이한규(李漢圭)가 감독하여 이루게 하고, 박계삼(朴啓三)과 권일전(權一銓)은 빛이 나게 색칠을 했다. 아, 서원을 존중함은 선생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끼쳐 주신 옷을 고맙게 생각하고 선생의 말씀을 칭송해야만 선생을 존경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이 끝나자, 나 문용(汶龍)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위촉을 하는 것이었다.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기에 분수를 잊고 대강을 서술하여 말하노라.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사우중수기(祠宇重修記)
정조 21 1797 8월 일 고을 후학 성주인(星州人) 이봉흥(李鳳興) 지음 본 서원(書院)은 강성군 충선공 문 선생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여러 임원(任員)들이 감독을 하여 수리함에 내가 가서 위로를 했다. 여러분이 말하기를, "이 서원은 즉 우리 고을 선대 어른들이 출입하신 곳입니다. 당신의 당숙(堂叔) 어른이 갑자년에 중수(重修)를 하셨고, 당신이 또 경인년에 수리를 했으며, 그 후 작은 수리를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소이다. 그 사실의 상황이 묻혀지고 말까 염려가 되니, 이번 일을 인연 삼아 당신이 한꺼번에 기록을 하시오." 라고 하는 것이다. 내 이 말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고을 안에서 꼴찌이어서 사람이 못나고 글의 능력이 좋지 못한데, 어찌 감히 글을 지을 수 있겠소? 그러나, 내 평생의 뜻이 현인(賢人)을 존경함에 있고, 또 당신들과 같이 현인을 떠받드는 사람을 또한 내가 존경하는 바요." 라 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분들의 말을 어길 수가 없어서 이에 분수 넘음을 무릅쓰고, 대강을 서술한다.
선생의 충효(忠孝) 절의(節義) 도학(道學) 큰 공은, 서원의 사적(事跡) 글에 실려 있으니, 이제 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역대 어진 임금님이 널리 권장하셨음과 여러 어진 분들이 지은 글을 말할 것 같으면, 오래 될수록 더욱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현 임금님(정조)께서 다시 서원 이름의 현판을 내리시고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질서확립에 빛이 나고, 은사(恩賜)한 현판이 번쩍번쩍하기도 하여, 나라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선비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봄과 이 서원을 지킴에 공경하고 삼가함을 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년(近年) 이래, 바람과 비가 계절에 따라 순조롭게 불고 내리지 않아서 많이 헐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을 안의 의논이 일어나 봄의 제사를 계기로 신주(神主)를 강당으로 모시고, 후손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음에 이르러 이 일이 시작되었으니, 특히 선생께서 끼치신 원대한 은택이 넓은 데에 미쳤음이 나타나는도다. 바람을 맞는 추녀와 달빛을 대하는 처마가 새로 단장을 하게 되어 집이 아름답고 훌륭하며, 돌 계단과 기왓장들의 줄이 옛 제도 대로여서, 거북이 엎드린 모양임에 드디어 음력 4월의 초일에 신주를 경건하게 제자리로 도로 모시었다. 아, 옛날에 귀부인이었던 문씨가 선생의 여손(女孫)으로서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사당을 신안(新安)에 세웠고, 이제는 이석관(李錫관) 군이 그 부인 문씨의 후손으로서 또한 이 일에 참여를 했으니, 감응(感應)하는 이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인을 높이 받드는 도(道)가 다만 사당에 모셔 제사 드리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음에 있는 것이다. 우리고을의 선생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어버이를 섬김에 선생께서 진심의 효도가 지극했음을 본받고, 임금을 섬김에 충절이 굳었음을 본받으며, 백성들에 대해서는 선생의 크게 감싸준 공을 본받고 도학은 전 해지다가 침체된 것을 다시 일으킨 선생의 수고를 본받아 행하며, 선생의 신주를 모신 방에 들어서 선생의 도를 배운다면, 그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바가 어찌 이보다 더 좋을 것이 있을손가? 원컨대, 여러 군자는 각기 힘써 주시라.
신안사재(제관 숙소)기 (新安思齋記)
1899년 음력 9월 9일 후학(後學) 성주(星州) 이도복( 李道復) 지음 명(明)나라 혜제(惠帝) 건문(建文) 2년인 경진년에,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삼우당선생(三憂堂先生) 문공(文公)이 돌아가시니, 우리 이씨조선의 정종대왕께서는 강성현(江城順) 북녘의 신안리(新安里)에 있는 갈로산의 양지에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시고 제전(祭田)을 하사하시고 묘사(墓祠)를 묘의 밑에다 짓게 하시며, 묘지기의 집을 두시고 세(稅)와 부역(賦役)을 면제케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신사년에는, 임금께서 포장하는 정문을 세워 「고려충신지문(高麗忠臣之門),이라 이름 지으시고 의정부참지사(議政府恭知事)를 추증(追贈)하시며,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고 시호를 내려 충선공(忠宣公)이라 하셨다. 선생은 고려의 끝머리 시기에 군주를 섬기었는데, 그 충성은 되놈나라 조정(朝廷)을 움직이게 했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효도(孝道)는 외국 것들을 감복시키었으며,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만세에 옷을 입게 했고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이단(異端)을 물리치니, 유학(儒學)의 공로 또한 선생에게 미치는 이 없었다. 그래서 역대 임금의 포장과 여러 어진 분들이 찬양해서 서술한 것이 다 이미 갖추어 졌으니, "일국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을 빛나게 일신(一新)시키었던 것이다" 라고 했다(이황이 효자비각기에서 말함). 우암(尤菴)이 이르기를,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이미 세상을 떠났음에, 그 전함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사적의 서문에서) 라고 하였다. 두 선생의 의논은, 간단하면서도 선생에 대해서 다 말한 것이 된다. 묘사(墓祠)에 대해서는 남명(南淚) 조식(曺植) 선생이 그 묘사기를 지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를 입은 뒤로는 사당이 없어 빈 터만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글이 비록 일부는 남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백세에 그 내용을 완전히 믿게 할 수가 있으니, 어찌 다시 너절한 말을 할 것이랴? 원근(遠近)의 후손들이 일찍이 그 빈 터를 찾아 한 초당(草堂)을 짓고서, 거기서 1년에 한 번의 제사를 올리었다. 철종 계축년에, 사손(祀孫) 병열(秉烈)이 그의 일가 재현(在賢)과 더불어 서러워하여 탄식하고 말하기를, "이건 우리 선조를 높여 받드는 길이 아니로다. " 라 했다. 그러고는, 곧 여러 일가들과 도모(圖謀)하여 정성을 다해 재물을 모아서, 기와로 갈아 이고 전의 관례를 더 새롭게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차마 폐지 할 수 없고, 차마 황폐(荒廢)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일 따름이었다. 현 임금님의 신묘년(고종28년 1891)에, 고을 사람들이 여러 칸의 깨끗한 집채를 그 옆에다 짓고, 춘추로 큰 제사를 올리고 학문을 강의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그 집이 좁으므로 고을에서 군자들이 찾아옴을 수용(收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꿔치기를 하여 정사(精舍)의 현판을 앞의 집채에 걸고, 새로 지은 집채의 이름을 신안사재(新安,思齋)라 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선비들이나 문씨들이 다 모여 일이 잘 되도록 보살피기로 했다 사(舍)는 현인을 존경하자는 뜻으로 된 것이고, 재(齋)는 지나간 먼 옛 분의 일을 그리워하자는 뜻으로 되었음에, 현인을 친(親)히 하는 도(道)가 또한 구비(具備)되었도다.
내 흘로 가만히 우암(尤菴) 선생께서 그 전함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라고 말한 바를 생각하는도다. 전해진 것이란 무슨 일인가? 이 신안사재에 올라선 사람이라면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다만 선생의 묘가 있고 선생의 고향이었다는 것만을 생각할까 보냐? 갈로산(葛蘆山)의 추백(楸栢)이 신안 (新安)의 강에 비치어 움직이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로다. 땅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집 이름을 붙이었음에, 거슬러 올라가 주자(朱子)의 전한 것을 터득하고, 선생께서 전해 받았던 것을 강의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후손이나 후학(後學)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으리라. 사손(祀孫)인 택호(宅鎬)가 나더러 선생의 고향 땅의 후생(後生)이라 해서 이 재(齋) 내력을 지으라 청함에, 나는 감히 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서 사양하지 못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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