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오현 동국18현-6 


 하서 김인후   1510 장성 대맥출생-1560  퇴계에반대 이기혼합설주장
                  기대승과 같이 태극도설, 사단칠정론 하서집, 주역관상편.
                  정조 20년-1796 종사문묘


 율곡 이이     1536년 강릉출생 -1584  대제학, 호조판서
                  기발이승일도 이통기국주장 십만양병설. 
                  성학집요 격몽요결, 사서언해 소학집주
                  숙종 8년-1682 종사문묘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 ·석담(石潭). 시호 문성
         (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
         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
         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
         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
         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
         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 ·이조의 좌랑 등
         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 ·부제
         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
         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
         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
         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
         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
         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
         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
         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
         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
         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
         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 전보
         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 ·서
         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
         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
         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
         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
         며, 동인 ·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
         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
         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
         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이이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
         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
         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
         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
         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
         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
         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
         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
         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
         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
         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
         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
         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
         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
         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
         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
         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
         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
         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
         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
         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
         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
         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
         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 ·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
         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
         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
         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 ·사단칠정론 ·
         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
         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
         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
         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
         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
         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
         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
         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 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
         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
         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
         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
         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
         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
         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
         (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
         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
         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
         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
         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
         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
         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
         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
         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
         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
         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
         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
         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
         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
         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
         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
         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우계 성혼     1535년 서울출생 본관 창녕   대사헌 우계집 퇴계문인
                  숙종 8년-1682 종사문묘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 ·묵암(默庵). 시호 문
           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
           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
           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
           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
           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 ·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
           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
           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
           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
           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
           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
           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
           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
           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
           는 조헌(趙憲) ·황신(黃愼) ·이귀(李貴) ·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
           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523년 인조반
           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
           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
           (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
           方)》 등이 있다. 
 
 
* 남명과 성혼

   우계 성혼(1535-1598)은 청송 성수침(1493-1564)의 아들이다.

   남명스승께서 아버지가 단천군수에서 서울로 올라왓던 1518년 서울 장의동에 사실
   때 이웃한 성수침과 친구로 지냈다. 성수침은 남명보다 일곱살이나 위엿으나 서로 
   터놓고 지냇다고 한다.

    성수침은 퇴계와 남명과 모두 절친하게 지내 두분들의 시를 받은 일이 있고 그의 
   문집에 이것이 실려있다.

    남명의 제자 수우당 최영경은 정철의 국문울 받고 장독으로 세상을 떠낫다.
   정철은 이이가 죽은 후 성혼과 가까이 지냇으므로 성혼이 최영경을 매우 친근히 했
   음에도 최영경은 성혼을 의심한 일이 있었다. 
   

 사계 김장생   1548년 서울 출생-1631 
                 숙종 43-1717년 종사문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