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오현 동국18현-2 안향 정몽주 회헌 안향 1243-1306 풍기 죽계출생 본관 순흥 주자학도입 매헌실기 晦軒 安珦 충숙왕 6년- 종사문묘 본관 순흥(順興).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시호 문 성(文成).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 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 史)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 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 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 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 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 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 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 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 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 (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 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 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 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 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 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 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 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 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이곳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1542년 안향을 배향하기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1549년 이곳 군수로 온 퇴계에 의해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은 최 초의 사액서원이다. 이곳은 안향이 공부하던 곳이다. 인근에 주세붕이 쓴 敬자가 잇으며 그 위에 퇴계가 백운동이란 글자를 새겼다. 그 규모와 풍광이 우리나라 최 초 최고의 서원이라할만하다. 사적제55호 포은 정몽주 본관 영일 1337년 영천출생 -1392 묘 광주모현면 동방이학의 시조 圃隱 鄭夢周 중종12년-1517 종사문묘(조광조)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 (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 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 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 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 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 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 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 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 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 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 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 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 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 (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 (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 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 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 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 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 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 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 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 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 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