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향당 이원 배산서당, 배양마을

남명과 동갑으로 뜻이 서로 맞아, 젊은 시절부터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하던 절친한 친구
가 있었다. 바로 단성현 배양리에 살았던 청향당 이원이란 사람이다. 면화시배지가 있는
마을이 배양리이다.
청향당 이원은 일찍이 남명이 의령 자굴산에서 글을 읽을 때 찾아와 함께 경서의 뜻을 
묻고 토론하기도 한 남명의 벗이다. 퇴계 이황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옛 일을 잘 아는 
등 무척 박식하였다.

네 가지가 같으니 원래 새로 안 사람과는 달라 (四同元不在新知)
나를 일찍이 종자기에 견주었었지. (擬我曾於鍾子期)
칠언시 오언시가 만금의 가치가 있건만, (七字五言金直萬)
곁의 사람은 한 편의 시로만 간주하누나. (傍人看作一篇詩)
 

남명이 청향당이 지은 시에 화답하면 지은 시이다. 
남명은 이 시에서 청향당과 4가지가 같다고 했다. 나이가 같고, 마음이 같고, 덕이 같고,
도가 같다는 말이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종자기가 죽은 뒤 그의 친구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를 알아주
는 사람이 없다 하여,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하는 옛 이야기를 인용
할만큼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절친한 벗으로 생각했다.
1537년에 청향당은 과거를 포기하고 청향정사(淸香精舍)를 지었다. 청향정사 옆에는 연못
을 만들어 연꽃을 심어 찾아오는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자연을 감상하기도 하였는데, 이
해 3월에 남명이 찾아와 ‘청향정사 팔영(淸香精舍八詠)’이란 시를 지었다. 청향당은 이
시를 나무에 새겨 자신의 서재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기자는 남명이 ‘청향정사 팔영(淸香精舍八詠)’을 남겼던 청향정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청향정사가 있었던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는 예로부터 효자리로 불렸을 만큼 유서깊은 마을
이다. 현재는 면화시배지로 더 알려진 이 마을은 원래 합천이씨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다른 성씨들도 더러 있지만, 아직까지 70여가구가 살고 있다.
청향당 이원의 직계 후손들은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 없었다. 청향당의 조카 죽각 이광우
종손인 이용규씨(75.단성면 배양리)를 만나 청향정사의 위치를 물었다. 
청향당의 13세손이기도 한 그는 현재 청향정사는 없어졌으며 위치에 대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옛 어른들로부터 전해오는 곳이 있다면서 기자를 안내하였다.
옛 청향정사의 터에는 일반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옛날 남명과 청향당이 연꽃을 바라보며
시를 읊조렸던 그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대숲은 아직도 그대로 인양 맑은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용규씨의 증언에 의하
면 이곳이 옛날 ‘원기터(서원터)’로 전해온다며, 원기터 앞에 청향정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씨의 젊었을 때까지 이곳에 늪지가 있어, 옛날 청향당이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
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약 500년전 남명을 비롯한 선비들이 찾아 풍경을 감탄하며 노래한 곳이지만, 지금은 그때
의 정취를 찾을 길은 없다. 다만 남명이 남긴 시들을 통해 알 수있을 뿐이다.
 

남명은 이 청향정사를 찾아 
‘대에 부는 바람(竹風)’ 
‘소나무에 비친 달(松月)’ 
‘거문고 소리(琴韻)’ 
‘눈속의 매화(雪梅)’ 
‘서리속의 국화(秋霜)’ 
‘화분에 심은 연꽃(盆蓮)’ 
‘경전(經傳)’ 
‘비석 밑돌’등 8수를 읊었다.


세 친구 소슬한데 오솔길 하나 (三益蕭蕭一逕通)
한미한 사람이 이루기 힘든 공 좋아하는것 가엾도다. (最憐寒簇愛難功)
싫도다, 소나무와 한 편이 되지 않고서 (猶嫌未與髥君便)
바람에 내맡겨 형세따라 오르내리는 것이 (隨勢低仰任却風)


남명이 청향정사에서 대에 부는 바람(竹風) 소리를 듣고 지은 시이다. 남명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대를 보고 선비의 지조를 생각했다.
지금은 남명이 보고 느꼈던 정경을 느낄 수 없어 안타깝지만, 아직도 대 숲은 있어 옛날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강동욱기자 kdo@gnnews.co.kr


♣남명위패 모신 배산서당


단성면 배양마을에 배산서당이 있다. 배산서당에는 청향당 후손들이 남명의 위패를 모셔놓
고 유덕을 기리고 있다. 청향당이 남명과 동갑으로 절진한 사이라서 모셔놓은 것이다. 남명
뿐만 아니라 역시 동갑인 퇴계의 위패도 모셔놓고 있다. 모두 1501년생으로 생전에 절친하
게 지냈던 것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배산서당은 삼우당 문익점을 모신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사액(賜額)을 받자 그곳에 같이 배
향되었던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과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를 따로 모시기 위하여 서
기 1771년(영조 47년)에 처음 덕연사(德淵t祠)를 배양마을에 세웠으나 그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서기 1919년에 합천 이씨 대표 진암 이병헌(眞庵 李炳憲)이 발의
하여 유교 복원을 위하여 문묘(文廟) 도동사(道東祠)와 강당을 짓고 이름을 배산서당이라 
했다.
중국곡부의 연성공부(衍聖公府)와 협의하여 그곳에서 공자의 진상(眞像)을 모셔와서 문묘에
모시고 도동사에서 청향당과 동갑으로 교분이 두터웠던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과 청향당을 
모시고 옆에 죽각을 배향하였다
강당에는 중국의 유명한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가이며 공양학자(公羊學者)인 강유위의 
자필인 배산서당의 현판 액자가 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이신 백범 김구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과 우천 조완구 성생과 백암 박은식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의 현판이 있다.
매년 봄 삼월에 유림들이 춘향을 모신다. 지방유형문화재 자료 제51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