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인간의 초상’
‘현대의 비극은 정치’라고 나폴레옹은 자주 말했다 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흔히 인용된다. 언뜻 부정적인 함의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은 인간이 ‘폴리스(도시국가)의 동물’로서 그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리킨 말이다. 정치적 폭력이나 정치적 부패에 길들여진 우리 사이에서 정치란 말은 아무래도 부정적인 함의를 갖게 되는 것 같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은 철저한 몰(沒)도덕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 역사적 인물의 전기이다. “실제의 현실생활, 즉 정치의 세력 범위에서는 탁월한 인물이나 순수한 이념의 소유자들이 일을 결정하는 일은 전혀 없고 그보다 한결 저질이지만 요령이 좋은 흑막(黑幕)적인 인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인식 아래 저자는 출발한다.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들 권력의 배후에 숨어있는 흑막적 인간을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권력의 위험한 비밀을 알려고 노력하자고 그는 책머리에 적고 있다.
1759년 선원의 아들로 항구 도시 낭테 근처에서 태어난 푸셰는 수도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혁명이 일어나자 승직을 버렸다. 낭테에서 자유주의자 클럽을 조직하고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한다. 1792년에 국민 공회(公會)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표나는 언동은 일절 피하면서 언제나 다수파 편에 선다.
처음 온건파에 가담했다가 루이 16세 처형 후에 강경 급진파가 된다. 지방 파견 위원으로 비(非)기독교화를 추진했고 리용에서는 반(反)혁명파 2000명을 처형해서 “리용의 학살자”란 이름을 얻었다. 지방에서 귀환한 뒤에는 로베스피엘 추방에 한몫을 했고 1795년의 총재(總裁)정부 아래서는 경찰장관의 자리에 오른다.
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때 그는 총재 중의 한 사람인 바라스에 등을 돌리고 나폴레옹 편에 선다. 1802년에 은퇴하고 원로원 의원이 된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데 한몫한 공로로 다시 대신이 된다. 45세 때 일이다. 52세에 다시 은퇴한 그는 억만장자 생활을 한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백일천하’를 누렸을 때 그는 다시 경찰장관이 된다. 그러나 상황의 변화를 직감한 그는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왕정 복고와 루이 18세의 등장에 한몫을 한다.
그 과정의 공로로 대신의 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루이 16세의 처형에 동의한 급진파의 이력 때문에 결국은 한직 외교관으로 쫓겨났다가 프랑스에서 영구히 추방된다. 프라하 등 몇 곳을 전전하다가 그는 트리에스테에서 사망한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변신과 배신으로 일관된 삶이었다. 그때 그때 권력의 추이에 따라서 전투적 무신론자, 종교 박해자, 사유재산 규탄자, 시민 학살자, 비밀경찰 두목, 왕당파 등 극우와 극좌를 오가며 제 역할을 가차없이 해낸다. 그는 철두철미 ‘파충류적 인간’이었다.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린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 그는 “내가 나폴레옹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워터루가 그를 배반한 것”이라고 내뱉는다. 그를 속속들이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마지막 귀양처에서 “나는 완전무결한 배신자를 꼭 하나 알고 있다. 그것은 푸셰”라고 말했다.
츠바이크가 푸셰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발자크를 통해서였다. 나폴레옹에게조차 공포감을 안겨준 기이한 능력을 가졌다는 발자크의 말이 계기가 되었다. 여러 자료를 섭렵해서 작성한 푸셰의 일대기는 흥미진진한 그만큼 너무 소설적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흑막적인 인물들이 대세를 주도해 왔다는 혐의가 없지 않은 우리 풍토에서는 시민 교육상으로도 읽을 만한 책이다.
다양한 문필 활동에도 불구하고 주로 전기 작가로 알려진 츠바이크는 빈 출신이다. 해박한 교양을 가진 유럽 인문주의자의 한 전형이었던 그는 유태인 박해를 피해 1934년 망명길에 올랐다. 영미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41년 브라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방대한 발자크의 전기를 계속하고 새 소설과 몽테뉴 연구에 착수했고 ‘어제의 세계’란 자서전을 탈고했다. 61세 되던 42년 2월 편집광을 다룬 마지막 중편을 탈고하여 뉴욕의 출판사에 보낸 후 그는 부인과 동반 자살하였다. 연합군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파시즘의 잔학 행위로 유럽이 영원히 상처입은 것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유종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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