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어쨌거나 세상은 달라졌다
며칠 전 나는 온종일 무섭게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며 보냈다. TV 히스토리 채널에서 천하의 명사회자 정운영씨가 진행하는 '다시 읽는 역사:호외'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시인 김지하와 한 시간가량 대담하는 걸 본 결과였다.
.
다른 사람도 아닌 김지하가 전국 TV 방송에 얼굴을 내밀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세상은 참 많이 변한 거다.
.
지금 젊은이들은 알 턱이 없다. 김민기라는 이름도 잘 모르는 판에 김지하를 모르는 건 요즘 젊은이들의 말대로 당근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김민기나 김지하를 모르는 시대가 된 것도 세상이 크게 달라졌다는 엄연한 증거다.
.
50을 넘긴 나는 잘 안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다. 내 젊은 시절 '아침이슬'의 김민기나 '오적'의 김지하는 너와 나의 영웅이었다. 한편 청년시인 김지하는 적을 이롭게 한 죄로 대한민국 사법부로부터 사형선고까지 받아냈던 악질범이었다.
.
그런 사실을 훤히 아는 내가 오늘날 벌건 대낮에 TV에 나온 김지하를 보았으니 어찌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는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게다가 당시 그를 사형까지 몰고간 문제의 시 '오적'을 다시 읽어보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올 정도였다. 군인.공무원.재벌 등이 왕창 떼돈을 벌어 서울 동빙고동에 새집을 지어놓고 떵떵거리며 산다더라는건대 요즘 같으면 구닥다리 민요풍 해학 풍자시 정도로 푸대접받을 내용이다.
.
그런 시 한 편이 한 인간에게 사형이라는 정신적인 고통과 6년여라는 육체적인 고통을 뒤집어씌웠으니 나는 또 한편 "아! 나도 그런 세상을 살아왔구나"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됐다.
.
남 얘기가 아니다. 나야 사형선고까진 안 받아 봤지만 몇몇 내 노래는 별 이유도 없이 사형을 당했었다. 잘 나가던 '딜라일라'나 '불꺼진 창'등이 느닷없이 방송 금지를 당했으니 노래의 입장에선 그게 사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금지 이유가 가관이었다.'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찼네'라는 노랫말이 너무 투쟁적이고 노래제목 '불꺼진 창'에선 왜 창에 불이 꺼졌느냐. 새마을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
그뿐 아니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으로 고초를 당할 즈음 나는 서울시 예산으로 세워진 와우동의 '와우 아파트'가 부실 공사로 폭삭 무너졌을 때 그걸 풍자노래로 딱 한 번 불렀다가 그 다음날 새벽 군대로 곧장 끌려갔었다. 그 사건 덕분에 나는 무사히 군복무를 마쳤지만 말이다.
.
그 후에도 나는 국가 통치자 앞에서 '각설이 타령'을 즉흥적으로 불러 영창 직전까지 가는 문제를 일으켰었다. 그때는 그 노래가 지금의 '화개장터'만큼이나 히트했던터라 내 딴엔 좋은 노래를 바친다는 의미로 불렀는데 웬걸 대통령을 각설이로 비유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나는 독한 문초를 받아야 했다.
.
지금 돌이켜 보면 한갓 난센스 코미디 같은 얘기다. 그러나 그때는 믿거나 말거나 거리의 순경들이 가위나 자를 하나씩 들고 장발을 손수 자르거나 여성들 무릎과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일일이 재며 다녔었다.
.
세상만 달라진 게 아니다. 사람도 달라졌다. 자료화면으로 본 그 옛날 사형선고를 받을 당시의 청년 김지하와 지금 회고록을 펴내고 TV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노시인 김지하는 생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
사회자가 물었다. 그토록 시인을 못 살게 굴던 사람들이 세상을 뜨고 권좌에서 모두 물러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시인이 웃으며 대답했다."라이벌이 없어 재미없습니다." 지금은 다른 세상이 됐노라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
"지금도 꼿꼿하십니까"라는 질문엔 "아니오. 지금은 부드러움으로 회귀 중입니다." 그렇다. 세상은 엄청 변했다. 지금은 누가 오적 아니냐고 떠들어도 제 발 저릴 사람이 없다.
.
군인도 공무원도 툭하면 감옥가고, 권력자도 툭하면 하룻밤 새 쇠고랑차고 심지어 재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대다. 어쨌거나 세상은 조금씩 살기 좋은 쪽으로 변하는 듯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 가수 조영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