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
조선일보 2012년 7월 20일
이성훈 파리특파원
파리에 새로운 관광 트렌드가 생겼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촬영 장소를 쫓아가는 것이다. 영화는 순수문학을 꿈꾸는 미국인 시나리오 작가가 약혼녀와 함께 파리를 찾았다가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그곳에서 아직 무명이던 헤밍웨이·피츠제럴드·피카소·달리 등을 만난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보다 초반부에 사진첩을 넘기듯 하나하나 보여주는 파리의 풍경들이 오히려 오랜 여운과 설렘으로 남았다는 영화 감상 후기가 많다. 감독은 카루젤 다리 밑의 센강 산책길, 몽마르트르 언덕의 계단, 파티가 열리던 생 루이섬 등 90년 전 모습을 지금의 파리에서 담아냈다. 주인공이 과거행 자동차를 타던 생 에티엔 뒤 몽 성당 앞 언덕길은 주차 표시 정도만 가리면 언제든 100년 전 파리의 뒷골목이 될 만큼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파리의 이런 모습은 1960년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찍으면서도 당시 서울 거리를 재현하기 위해 별도의 세트장을 만들어야 하는 우리와 너무도 다르다. 간혹 이런 세트장을 관광지로 만드는 지방자치단체도 있지만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가 시들해지면 찾는 사람이 없다. 모조품이 생명력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파리는 1800년대 중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틀이 잡혔다. 나폴레옹 3세의 지시를 받은 오스만 남작이 개선문 주변 대로(大路)를 조성하고 오페라 가르니에 등 기념비적 건축물과 불로뉴 숲을 만들었다. 파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용케 견뎌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마른(Marne)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반격으로, 2차 세계대전 때는 변변한 저항 없이 너무 일찍 함락되는 바람에 포화를 피했다. 1944년 8월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이었던 콜티츠 장군은 파리를 폐허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파리의 매력이 루브르박물관 같은 화려한 볼거리나 명품 쇼핑만은 아니다. 파리는 도시 곳곳에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무명의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서점, 사르트르가 연인 보부아르와 만나던 단골 카페, 가난한 장교 나폴레옹이 모자를 맡기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하던 레스토랑이 있다. 모두 계단이 삐걱대고 엘리베이터는 2~3명만 타도 꽉 찰 정도로 낡은 건물들이지만 파리는 그런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물론 파리가 영화처럼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보도블록은 깨져 있고, 에어컨도 없이 악취 나는 지하철은 끔찍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적은 비에도 금방 물웅덩이가 만들어지는 곳이 파리다. 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조 계획도 처음엔 "새롭지만 단조롭고 지겨운 도시가 될 것"이라는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파리는 150년 동안 천천히 세월을 삭혔다.
그에 반해 주름 펴듯 골목길을 밀어버리고 미끈한 고층 빌딩을 올리는 한국의 도시는 보톡스 주사를 맞은 것 같다. 주름과 함께 세월의 매력도 함께 잃어버린 얼굴이다. 새로운 건축 디자인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지만 도시에 세월의 흔적을 남기는 일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