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자취를 찾아서 - 10
무진봉사
우리나라엔 1568년무진봉사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퇴계의 것이요 하나는 남명의 것이다.
두 분 다 만년에 지방에서 임금께 올리는 충언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명문장이다. 그러나 퇴계는 왕도정치를 주로 논하였고 남명은 백성의 어려움을 주로 토로하여 두 분의 각기 다른 면모를 그대로 볼 수 있다.
퇴계의 봉사 내용은 모두 6조(條)로 되어 있다.
첫째, 〈중계통이전인효 重繼統以全仁孝>..왕통(王統)과 가통(家統)은 인(仁)과 효(孝)로써 일체를 이룬다. 둘째, 〈두참간이친양궁 杜讒間以親兩宮〉... 효(孝)·자(慈)를 가정을 다스리는 근본임. 참소를 막아서 양궁(兩宮：선조가 거처하는 왕궁과 入後한 명종비 인순왕후가 거처하던 궁)을 친하게 할 것을 주장. 셋째, 〈돈성학이립치본 敦聖學以立治本〉.. 유가의 제왕학(帝王學)·왕정학(王政學)은 순(舜)임금의 명(命)에 그 역사적 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그 요체는 군주가 경전을 통해 성(誠)을 체득해 인·의·예·지·신의 도를 실천함으로써 덕치·위민 정치를 구현하는 것임을 강조. 넷째, 〈명도술정인심 明道術正人心〉에서는 도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로잡을 것을 강조함. 불교·도교 등이 인심을 해치고 있기에 임금은 성학에 힘써 인심을 바로잡기를 바란다는 내용. 다섯째, 〈추복심이통이목 推腹心以通耳目〉.. 나라는 사람의 신체와 같아서 군주는 대신을 신임하고 대간의 말을 존중함으로써 다스림의 실(實)을 기할 수 있음. 여섯째, 〈성수성이승천애 誠修省以承天愛〉.. 유교적 재이관·자연관에 입각해 인군(仁君)이 천심을 본받아 인애로써 민을 다스릴 것을 강조함
이는 이이(李珥)의 〈만언봉사 萬言封事〉와 더불어 조선시대 왕정학(王政學)의 쌍벽을 이루며〈퇴계전서 退溪全書〉에 수록되어 있고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남명의 무진봉사는 胥吏(아전)亡國論이 그 주제다.
남명은 68세(1568년)에 새로운 정치 시대를 열어보려는 선조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1,600여 자에 달하는 긴 문장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정치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관리를 선발할 때에 문관은 시와 문장으로 시험을 치렀고, 무관은 활쏘기, 말타기로 뽑았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하는 관리들은 실무를 제대로 몰랐다. 그리고 인사이동이 심해서, 관리들은 일을 파악할 수 없어 모든 행정이 저절로 아전들 손아귀에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전문>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백성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주상 전하께 상소하나이다(上疏于主上殿下). 엎드려 생각하건대, 저는 노쇠한 병이 점 점 더 해서,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고 몸은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부르시는 명을 거듭 내리시니, 길 떠날 거마를 기다림도 오히려 뒤로 해야 하지 만,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길을 바라보기만 할 뿐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진실로 죽을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성상의 은택을 보답 할 길이 없음을 아옵기에, 감히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말을 다해서 대왕 전하께 올립니다.
엎드려 보건대, 주상께서는 상지의 자질을 타고 나셔서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시는 마음이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백성과 사직의 복입니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남에게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임금 자신이 善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 그 本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선을 밝힌다는 것은 이치를 궁구함을 이름이요, 몸을 정성스럽게 한다 함은 몸을 닦는 것을 이름입니다. 사람의 性情 속에 萬理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仁義禮智가 곧 그 體요, 善이 모두 그 體로부터 나옵니다.
心은 理가 모이는 바 主體요, 身은 心을 담는 그릇이니, 그 이치를 궁구함은 장차 用에 이르게 하려 함이요, 몸을 닦는 것은 장차 道를 행하고자 함입니다.
그러한 이치를 궁구하는 바탕이 곧 讀書이니, 의리를 講明해서 應事의 當否를 구하는 것이 그것이요, 몸을 닦는 方인즉 體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窮理修身의 本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그 홀로 있음을 삼가함은 天德이요, 이것을 밖으로 發해 省察해서 힘써 行하는 것이 王道인데 그렇게 되도록 하는 공부는 반드시 敬으로써 主를 삼아야 합니다.
이른바 敬이란 늘 자기가 처해있는 환경을 整嚴하게 하고 자기의 마음을 늘 밝게 깨어있게 하여 一心이 주인이 되어 만사를 제어함을 말함이니 공자가 이른바 敬 으로써 몸을 닦는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까닭에 敬을 主로 삼지 않고는 心을 좌정시킬 수가 없고 심을 좌정 시키지 않으면 천하의 이치를 궁구할 수가 없으며 이치를 궁구하지 않고서는 사물의 변화를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사이에서 실마리가 싹터서, 가정과 국가 그리고 천하에 미치는 것이며 다만 밝은 덕과 악함을 구분해서, 몸을 진실하게 하는데로 되돌아 갈 따름입니다.
아래로 일상생활 속에서 배우는 사람이 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위로 하늘의 이치로 도달하는 것이 역시 학문으로 나아가는 차례이기도 합니다.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하늘의 이치를 말한다는 것은 바로 입에 발린 이치일 뿐입니다.
자기 자세를 되돌아보지 않고 들어 아는 것은 귀 언저리의 학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의 꽃이 아무렇게나 떨어진다고 말하지 말지니 그런 것에는 몸을 닦는 이치가 전혀 없습니다.
전하께서 과단 있게 능히 경으로써 자신을 닦아 하늘의 덕에 통달하고 왕도를 실행하시어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고 난 후에야 머무신다면 선을 밝히는 것과 몸을 진실하게 함이 함께 갖추어지고 사물과 자신이 함께 일치를 이루어집니다. 정치와 가르침이 이를 바탕으로 해서 베풀어지면, 마치 바람이 부는 대로 구름이 몰려가듯이 효과가 바로 나탈 것입니다.
위에서 최선을 다하면 아래 사람 가운데에서 더욱 더 열성적인 사람이 있게 됩니다.
임금님이 하시는 학문은 선비의 학문과 달라 그 실천함이 구경(九經)보다 더욱 중요합니다.주역(周易)은 때에 따라 옳게 행하는 뜻이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사정을 미루어 말하자면, 나라님이 정하신 뜻대로 행해지지 않고, 다스림에 사사로움으로 넘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명은 어긋나게 나오기만 하고, 기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지 몇 대가 되었습니다. 대단한 위엄을 떨치지 못한다면, 갈래갈래 풀어 흐트러진 형세를 거두어 모을 수가 없습니다. 큰 장마비가 내려 이것을 젖게 해주지 못하면, 7년 동안 말라비틀어진 풀을 적시어 구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나라님을 도와주는 훌륭한 정승을 얻어 위아래가 서로 힘과 마음을 합해 공경하고, 마치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처럼 된 뒤에야 차츰차츰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재를 등용하는 일은 손으로도 몸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수양되지 않으면 스스로 판단할 기준이 없고,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를 알 수 없어 등용하고 버리는 일을 잘못하게 됩니다. 인재 역시 자기가 쓰이지 못하는데, 누가 나라님과 더불어 정치를 이루려고 하겠습니까?
옛날에 다른 나라 사정을 잘 파악하는 사람은 그 나라 힘이 강한지 약한지를 보지 않고, 그 나라에서 인재가 잘 쓰이는지 혹은 잘못 쓰이는지를 살폈습니다. 이것으로 천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비록 나라가 매우 어지럽게 될지 잘 다스려 질지는 모든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서부터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며, 현명한 사람이 쓰이는 것은 다스림이 나타나는 근본이 됩니다. 몸을 닦는 것 또한 인재를 등용하는 근본입니다. 온갖 훌륭한 말이 어찌 자기 몸을 닦고 인재를 등용하는 일에서 벗어남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그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면, 군자는 초야에 묻히었고 소인이 나라를 마음대로 해버리게 됩니다.
옛날부터 세도부리는 신하가 나라를 마음대로 다스리는 일도 혹 있었고, 외척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도 가끔 있었습니다. 여인이나 내시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예도 간혹 있었습니다. 아전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해버리는 예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정치가 높은 관리에게서 나와서도 오히려 되지 않는데, 하물며 아전에게서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당당한 제후의 국가로서 조정의 200년의 업적에 힙입고 공경 대부 가 잎뒤에서 서로 따르는데 천한 서리에게 정권을 돌립니까? 이것은 소귀에도 들리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군정(軍政), 민정(民政) 등 여러 가지 사무와 나라의 중요한 업무가 모두 아전 손에서 나옵니다. 한 타래 실이나 한 톨 밥도 서리 손에 맡겨 바치지 않으면 통하지 않습니다. 대궐 안으로 재물이 모여들지 몰라도, 밖으로 민심이 흩어질 대로 흩어져 열에 한 사람도 남아 있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각 고을을 아전들 자기들끼리 나누어 맡아, 마치 사유물인 듯 문권(文券)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합니다. 각 지방에서 바치는 특산물을 제대로 바치지 못하게 방해하니, 하나의 공물도 바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공물을 바쳤던 사람들은 온 가족이 합쳐 가산을 다 팔아서 가도, 관청에 바치지도 못하고 여러 개인 집에 갖다 바치고 있는데, 원래 바치는 특산물에 백 배를 넘기지 않으면 받기조차 않습니다, 한 번 그렇게 바칠 수는 있지만, 공물을 계속해서 바치지를 못해서 도망가는 사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어찌 여러 임금을 거쳐 이어받은 고을과 백성이 바치는 곡물을 갑자기 날다람쥐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까? 어찌 나라님은 나라를 독차지하는 부유함을 누리면서도, 도리어 이 종들이 백성을 대신해서 맡아 바치는 재물에서 자금을 구하려고 합니까? 비록 중국 한 나라를 망쳤던 왕망과 동탁같은 간신들도 아직 이러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라가 망하는 세상에도 또한 아직 이와 같이 않았습니다.
아전들이 이런 짓거리까지 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더해서 나라님이 쓰시는 내탕고마저 훔치려고 합니다. 나라에 쌓아 둔 것이 조금도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님 바로 아래에 도적이 가득 차 있고, 나라는 텅 빈 껍데기만 끌어안고 있습니다. 온 조정 관리들이 목욕재계하고 멋대로 날뛰는 아전들을 쳐 없애야만 합니다. 혹 힘이 모자라면 온 누리에 호소해서 왕을 위해 군사를 모아야 하고, 편안히 먹고 자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작당해서 좀도둑을 한다면, 포졸들에게 급히 잡아들이는 것을 명하시는데, 그 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만 , 아전들이 도둑이 되어 모든 관청에 무리를 이루고 들어가 웅거해서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 나라 혈맥을 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희생까지 훔치고 있습니다. 나라 법을 다스리는 관리들은 감히 묻지를 못하고, 형조도 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혹 하급 젊은 관리들이 조사해서 탄핵하려고 하면, 오히려 견책과 파면이 그 손아귀에 쥐어져있고, 관리 무리는 팔짱을 끼고 일하지 않으면서, 겨우 녹봉이나 받으면서 비위를 맞추며 따를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믿는 데가 없고서야 이렇게 멋대로 날뛸 수가 있겠습니까?
초왕(楚王)이 총애받는 도독이 있어 없애버릴 수 없다고 말한 이유도 이것입니다. 꾀 많은 토끼가 도망 다닐 굴을 세 개나 파서 준비하고 있듯이, 냇가 조개가 껍질 속에 몸을 감추고 있듯이, 아전들이 남을 해치고 온갖 일을 꾸미고 있는데, 나라에서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쥐새끼들과 한 무리를 이루어 감싸고 있는 관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요?
전하께서 크게 노하시어 기강을 크게 떨치시고, 재상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해서 그 원인을 따져 묻고, 스스로 나라님이 결정한 뜻대로 결단해야 합니다. 마치 순 임금이 네 흉악한 무리들 물리쳤듯이, 공자가 소정묘(小正卯)를 베어 죽였던 예와 같이 나쁘고 나쁜 무리들을 모조리 없애 백성들의 뜻을 크게 두려워하고 존중해야합니다.
만약 언관이 처벌해 줄 것을 그치지 않고 주장한다고 해서, 마지못해 처벌한다면 누가 착하고 나쁜 점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옳고 그름이 있는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결국 임금의 도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임금의 도리를 잃고서도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자신의 밝은 덕을 미리 밝히면, 마치 거울에 밝은 덕이 비쳐지고 있는 것 같이, 비추지 못할 물건은 없습니다. 덕과 위엄을 떨치고 더욱 더 떨치면, 바람에 풀과 나무가 모조리 쓰려 쓰러집니다. 하물며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아래 사람이 벌벌 떨고 조심해서 두려워하고, 몹시 바삐 명령을 받아들이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 조금이라도 간사한 꾀를 부릴 틈도 있겠습니까?
정치를 어지럽히는 벼슬아치에게 정해진 형벌이 있습니다. 윤원형 같은 세도부리는 간신도 조정에서 바르게 처벌하였는데 하물며 여우나 쥐새끼 같은 아전들이야 형틀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습니다. 한차례 우레와 사나운 비바람이 하늘을 뒤흔들고 몰아치면서 천지가 움츠린 기운을 활짝 풀어헤치고 싹틉니다. 이것은 나라님이 위로 몸을 닦으면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 나라님을 도와 줄 뛰어난 정승이 없겠습니까? 누구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자며 부지런히 일하는 어진 사람이 없겠습니까? 간신들은 자기들 뜻에 거슬리면 이를 없애버리면서도, 간사한 아전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어도 받아주고 있으니, 이들은 자기 한 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깊은 산골에서 쓸쓸히 지내며, 굽어보아 아래로 땅을 살피고 우러러보아 위로 하늘을 관찰하고, 터지어 나오는 탄식을 억누르지 못해 여러 번 눈물을 흘린 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신은 전하와 군신 관계를 한 번도 맺지 않았습니다만, 전하에게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탄식하며, 눈물을 스스로 그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관계는 얕으면서 관계 깊은 말을 한다는 것은 실로 신에게 죄가 있다고 할 수 없겠습니까. 생각하건데, 이 몸이 이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으며 살고 있고, 여러 대에 걸쳐 이 땅에 살아가는 백성인데, 외람되게도 나라님 3대에 걸쳐서 벼슬없이 지내는 선비에게 국정에 자문을 묻기 위하여 불러들이는 징사(徵士)가 되었습니다. 옛날 중국 주나라 어떤 홀어머니가 베를 짜다가 베틀에 씨줄이 떨어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였던 것처럼,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어찌 한마디 말을 아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지난날에 구급(救急)이란 두 글자를 상소하였지만, 전하께서 불구덩이에서 사람을 끄집어내듯,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이, 급히 서두르신다는 소문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다만 늙은 선비가 강직한 체 보이려는 소리일 뿐이니, 생각을 움직일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하물며 제가 아뢴 임금의 덕에 관한 말이 옛 사람들이 이미 아뢴 말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궤도를 경유하지 않으면 나아갈 길이 없는 법입니다.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 것과 같고,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가려고 한다면, 물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지금 나라 사정은 신이 지난날에 아뢸 때보다 훨씬 더 급박해졌고, 너무 많아졌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이 아뢴 말을 저버리지 않고 좋은 본보기로 받아들이어 주신다면, 신은 비록 천리 멀리 밖에 있어도, 용상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꼭 신이 늙고 추한 모습을 본 뒤에, 신을 기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듣자오니, 나라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헤아려 본 뒤에 벼슬하러 간다고 하는데, 실로 아직 전하는 어떤 임금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시면서 한갓 신을 만나보려고만 하신다면, 헛일을 하실 따름입니다. 겉으로 좋아하시는 것 같지만, 내심으로 반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사람 알아보는 눈이 밝은 지 어두운 지에 따라 앞날 정치의 성패를 예측하고자 합니다.
(伏惟上察 謹疏)엎드려 바라옵니다. 나라님께서 굽어 살피어 주시옵소서. 감히 상소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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