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11
설화속의 자취
남명 조식은 그의 명망 만큼이나 많은 설화를 남겼다. 그의 발자취 뒤엔 어김없이 마을이나 고개 이름에 대한 유래가 남겨졌고 갖가지의 설화가 잉태됐다. 이 설화들은 현대에 이르러 역사소설속에 강직한 선비의 표상으로 남명이 등장하게 되는 연원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구비설화는 남명사상의 발원지인 산청 덕산을 중심으로 합천, 하동, 김해 등지에서 대략 30여편에 이른다.
구비설화속의 남명은 문헌설화에 비해 지역민들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허구성을 띠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남명의 높은 절의와 기상이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되고 있다. 남명의 기상을 드러낸 설화로는 ‘윤원형의 종을 혼낸 남명’과 ‘남명의 세가지 소원’이 두드러진다.
남명이 상서원 판관을 제수받고 한양에 명종을 배알하러 갔을 때 한강을 건너면서 윤원형의 세도를 믿고 거드름을 피우는 종을 하인을 시켜 혼내주었다.
종이 주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당시 문정황후의 동생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누리던 윤원형은 “네가 잘못 걸렸다. 나도 남명을 꺼려한다”며 꽁무니를 뺐다는 얘기다.
또 남명의 호방한 기상은 ‘세가지 소원’ 설화로 남겨졌다.
남명은 평소 세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첫째는 천하의 미인을 얻는 것이요, 둘째는 천하의 명검을, 세째는 천하의 명마를 얻는 것이었다. 이같은 남명의 설화속의 형상은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강직한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이재운의 ‘토정비결’에서는 도가(道家)적 방외인(方外人), 정동주의 ‘백정’에서는 실천유학자의 표상으로 이어졌다.
산청 덕산에서 전해 내려오는 ‘꺽지 토포(吐哺)’ ‘상사 구렁이’ ‘솟을랑 고개’ 설화는 남명이 이적을 행한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강조한 설화들이다.
‘꺽더구’라고도 불리는 ‘꺽지’는 산청군 덕천강에서 많이 잡히는 농어과의 민물고기다. 하루는 남명이 제자들과 더불어 덕천강변 탁영대(濯纓臺)에서 ‘꺽지’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고 놀았다. 남명이 ‘꺽지’ 한 마리를 입에 넣고는 문득 천기(天機)를 보니, 명종대왕이 돌아가셨는지라 국상을 당한 선비의 도리로 남명은 베물었던 고기를 물에다 뱉어 버렸다. 그 이후 덕천강 꺽지는 아가미 부분에 남명의 치아에 깨물린 자국이 하얗게 나타나게 됐다고 전한다.
관심을 끄는 구비설화는 역시 당대 유림의 양대산맥인 남명과 퇴계를 비교한 것들이다. 유림의 종사로 추앙받는 남명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존심은 도술, 천기 능력 등 여러 설화를 통해 남명을 퇴계보다 우위에 두었다.
지금은 ‘까막고개’로 불리는 하동군 옥종면 종하리와 안계리 사이에 있는 ‘가마고개지(池)’에 얽힌 설화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남명과 퇴계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산청군 단성면에서 국도 20호선을 타고 시천면쪽으로 달리다 칠정마을에서 왼쪽 하동방면으로 빠져 다시 7㎞쯤을 달려 나지막한 고개위에 올라서면 왼편에 예전엔 커다란 저수지였다는 10평 남짓한 연못을 만나게 된다.
양반들의 권세다툼이 심했던 광해군 시절 종하리와 안계리에 살던 두 마을의 처녀가 같은 날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두 꽃가마가 외길인 이곳을 지나다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안계리 처녀는 퇴계문하의 집안이었고 종화리 처녀는 남명문하의 집안이었다.
길을 비켜가면 불행이 온다는 관습도 있었지만 학통이 다른 양가의 체면이 서로 길을 양보할 수 없다며 버텼고 결국 사흘간을 옥신각신하던 끝에 한편의 가마가 못에 빠져 신부가 죽었고 이후로 이곳을 ‘가마고개’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에 관한 설화들은 당시 양대 유림의 자존심을 건 갈등관계로, 또는 퇴계에 비해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남명에 대한 지역민들의 울분과 안타까움이 설화로 표출됐다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설화가 남명의 곧은 절개와 기상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온후했던 심성을 나타내는 설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산청군 삼장면에 내려오는 송객정(送客亭)과 면상촌(面上村)의 이름유래가 그것이다.
송객정은 덕천서원이 있는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서 대원사 방면으로 3㎞쯤 떨어진 덕교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다시 3㎞정도를 더 가면 대원사로 꺾어드는 삼거리가 있는 마을이 면상촌이다.
남명은 산천재에 머물던 스승을 찾아온 제자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산음 (山陰;현 산청읍)으로 되돌아갈 때는 몸소 10리 길을 따라 삼장면 덕교마을에서 제자를 전송했다. 후세사람들은 이곳을 송객정이라 불렀고 제자는 스승과의 헤어짐을 아쉬워 하며 뒤돌아보면서 가다가, 면상촌에 이르러서야 스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낯(面)을 위(上)로 하고 갔다고 하여 ’면상촌(面上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 이민용기자
역사속의 평가는?
민초들의 입을 통해 내려오는 남명에 얽힌 설화가 허구에 치우쳤다면 엄정한 역사의식으로 기록한 사신(史臣)들의 남명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이조왕조실록’에 기록된 남명 관련기사는 중종실록, 명종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정조실록까지 약 106조에 이른다.
실록에 나타난 남명의 기록은 대부분 벼슬을 내린 것과 이를 물리치며 상소문을 올린 것에 대한 조정의 논란과 사신의 평가가 대부분이다.
남명이 단성소를 올린 1555년(명종19년) 명종실록에는‘사신은 논한다. 조식은 시골의 선비로서 비록 벼슬보기를 뜬 구름같이 여겼지만 오히려 임금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근심하는 마음이 말과 글에 드러났고 간절하고 강직해 회피하지 않았으니, 명성을 거짓으로 얻은 자가 아니라고 말할 만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명이 상서원판관을 제수받아 명종을 배알했던 1566년(명종33년) 실록에는 ‘조식은 기상이 초매하고 소견이 매우 고상했으며 세상 일에 대해 분개하는 뜻이 항상 말에 드러났다. 서울로 오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는데 사람들이 무엇을 물어도 모두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혹 해학으로 희롱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학식의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남명이 세상을 뜬 1572년(선조5년) 실록에는 ‘처사 조식의 졸기’라는 제목으로 ‘조식은 도량이 청고하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론(言論)은 재기(才氣)가 번뜩여 뇌풍(雷風)이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利慾)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했다’고 적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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